해파리처럼 흔들리면서도, 불안 속에서 반응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일
살면서 우리는 온갖 종류의 불안에 휩싸인다. 아니, 정확히는 자주 휩쓸린다. 불안은 우리 삶에서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불안을 느끼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불안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을 때다. 마음에 그걸 연습할 공간이 없을 때,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이상한 방식으로 무너진다.
나는 꼼꼼한 편이고, 그만큼 스스로에게도 까다로운 편이다. 그래서 늘 나를 가다듬고 되돌아본다. 그러다 보면 그 과정에서 나의 불안은 대개 ‘잘하고 싶은 마음’의 다른 이름으로 찾아온다. 사람들에게 잘하고 싶고, 일을 잘하고 싶고, 내가 맡은 역할을 끝까지 책임지고 싶은... 그래서 나는 칼을 벼리듯 집중하고, 동시에 사람에게는 따뜻하려 애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안은 그 틈을 잘 안다. 가장 바쁜 순간에, 가장 예민한 순간에, 가장 취약한 곳으로 들어온다.
얼마 전 이런 일이 있었다.
내 팀에서 함께 일하는 E에게 피드백을 주었다. 그런데 마감일이 되어서야 E가 무관심하게 말했다. 자신은 아직 피드백을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순간 속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나는 일단 한 번은 기회를 주기로 했다. 기다려보기로 했다. 어쩌면 그건 관용이라기보다, “나는 이 정도는 품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며칠 뒤, 새 작업물이 올라왔다.
피드백은 대부분 반영되지 않은 채였다.
지난주 내내 버티듯 일해왔는데, 내 앞에 이런 결과물이 놓였다는 사실이 힘들고, 머리에서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다. 한참 끓이다가 바닥을 보인 주전자처럼. 그런데도 나는 E를 직접 겨냥하지 않았다. 다시 피드백을 남겼고, 반응하기를 기다렸다. 나는 늘 그렇듯 “일은 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 날 하루가 끝나고 자정이 지난 시점이었다.
업무 공간에 내 이름이 태그된 댓글이 달렸다.
“나한테 이 프로젝트를 가져가서 니가 원하는 기대치를 마법처럼 맞출 수 있는 사람한테 주던가 해. 고마워.”
머리 뒤쪽에서 뭔가가 단단히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 이러려고 내가 봐준 게 아니었는데. 이러려고 친절하게, 다정하게 군 게 아니었는데.
무엇보다 그 말이 공개된 공간에 남았다는 게 견딜 수 없었다.
나를 타겟팅하고, 비꼬고, 모멸감을 주는 방식이었다. 화가 나서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 순간의 나는 화가 난 게 아니라, 어쩌면 아주 오래된 불안에 휩쓸린 사람이었다. “나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누군가에게 증명해야 할 것 같은 불안.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읽을 때마다 의미가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에는 비꼼이 보였고, 그다음에는 분노가 보였고, 마지막에는 아주 노골적인 무시가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불안은 늘 이런 식이다. 내 감정을 “지금 당장 증명해야 하는 것”으로 바꿔버린다. 내가 얼마나 단단한 사람인지, 얼마나 만만하지 않은 사람인지, 내가 여기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그 순간의 나는 상처받은 사람이기보다, 평가받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불안은 늘 평가받는 사람을 가장 먼저 흔든다. 나의 능력보다, 나의 태도보다, 나의 표정과 반응을 먼저 흔든다. 그래서 나는 더 조심스러워졌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남을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사람이 회사에서 일로 만나는 사이가 아니라 가까운 친구였다면, 나는 아마 바로 관계를 끊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 자리에서 반박하고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같이 일하는 사이고, 나는 이끄는 사람이다. 그럼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반박하면 내가 감정적인 사람이 되는 걸까.”
“가만히 두면 사람들이 나를 만만하게 볼까.”
“나 그렇게 만만한 사람 아닌데.”
온갖 생각들이 우주선을 타고 별과 행성을 지나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로 날아가듯,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불안은 늘 이렇게 과장된 미래를 보여준다. “지금 이 한 순간이 너의 모든 평판이 될 거야”라고. “너는 흔들릴 거야”라고.
그래. 일단 리더로서 행동하자.
나는 메시지를 캡처했다. 그리고 내 상사에게 보고했다. 최대한 쿨한 척, 감정을 컨트롤하는 척. 마치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하지만 주말 내내 속으로는 소리를 오만 번쯤 질렀던 것 같다.
나 그렇게 우스운 사람 아니라고.
주말 내내 K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빨래를 개면서도, 새로 산 신발의 끈을 핀터레스트에서 본 것처럼 예쁜 모양으로 묶으면서도 나는 계속 생각했다.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그냥 어디선가 한 방울씩 계속 흘러나왔다.
이럴 때 불안은 ‘생각’이라는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계속 떠오르고, 계속 되감기고, 계속 다시 상상하게 만든다. 내가 하지 않은 말을 하게 하고, 듣지 않은 말까지 듣게 한다.
예전의 나라면, 속된 말로 ‘본때’를 보여줬을 것이다. 작은 아시안 여성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겠다는 얄팍한 마음까지 섞여서. 나도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게 싫지만, 불안은 가끔 사람을 그쪽으로 밀어붙인다. 지키고 싶은 것이 클수록, 사람은 더 공격적으로 변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생각이 흘러나올 때마다 나는 나에게 되뇌었다.
“나는 지금 바로 반응하지 않아도, 이 상황을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다.”
“나는 내 위치가 흔들릴까 봐 불안한 거다.”
“사람들이 이 상황을 통해 나를 우습게 본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 미성숙한 거다.”
모든 사람은 불안을 끌어안고 산다. 한쪽으로 계속 자면 어깨가 아파 돌아눕듯이, 오뚜기가 계속 흔들리듯이. 우리는 불안과 함께 돌아눕고, 흔들리며 산다. 다만 그 흔들림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사람을 나눈다.
계속 흔들리면서 같은 자리에 머무를 것인지,
혹은 흔들리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그 흔들림 속에서도 방향을 잡아 나아갈 것인지.
모든 사람은 감정을 가진다. 하지만 감정을 처리하는 건 결국 각자의 몫이다. 나는 조용히, 정제된 방식으로 드러냈을 뿐이다. 어쩌면 나는 지금도, 불안을 다루는 연습을 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분명 E는 감정 방어 단계에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든, 논리로 설득할 수 있는 구간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불안은 사람을 돌아버리게도 만드니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더 거칠게 휘두르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일이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선을 넘은 상황을 즉시 바로잡지 못한 채 남아버린, 잔존 각성 같은 상태.
나는 공격당했다.
그리고 즉각 싸우지 않기로 ‘의식적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그 에너지는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넓은 바다에서 해파리처럼 부유하듯 떠다닌다. 내가 공격을 당하거나, 공격하고 싶은 상대를 만났을 때 나는 계속 되뇌인다.
“내가 지금 안 쏘는 건, 못 쏘는 게 아니라 선택이야.”
나는 무력해서 참은 게 아니라, 타이밍을 고른 거라고.
그리고 그 선택이 늘 완벽하게 나를 편안하게 하지는 않는다. 선택은 종종 더 조용한 방식으로 나를 흔들어 놓는다.
내 두서없는 말에서 불안이 느껴진다면, 그건 아직도 내 안의 해파리가 충전 중이기 때문일 거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래도 이제는 넓은 바다 속 그 많고 많은 흔들림 속에서도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조금은 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