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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은 Jun 03. 2020

최선을 다했지만, 아직 대리입니다.

글 쓰는 딸과 시 쓰는 아빠 - 1. 일

최선을 다했지만, 아직 대리입니다.


‘누구나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누구나 잘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회사에서 항상 듣는 이야기이다. 경제학적으로 최소의 인풋으로 최대의 아웃풋을 내라는 뜻이겠지만, 업무가 아닌 생활 전반에도 언제부터 인지 이러한 생각이 자리를 잡았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고등학교부터 누군가 나에게 장래희망을 물으면, 꿈이 있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도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았고, 어떤 직업을 꿈으로 결정하기에는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그냥 회사원으로 자랐지만 여전히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회사에서 배운 잘해야 한다는 강박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해보는 것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일본 드라마를 좋아하던 나는 회사에 와서도 취미로 일본어를 계속했다. 바쁜 삶 속에서 학원에 가서 원어민 선생님과 수다를 떠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일본어는 회사원의 취미에서 회사원의 특기로 슬그머니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연하고, 인사 시스템에 1등급을 남기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인사 시스템에 한 줄이 추가되면, 진급할 때 가산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과장이 되기 위해 나의 취미를 특기로 치환하였다.


꾸역꾸역 공부를 해 나가던 나에게 회사 선배가 일본에 사는 선배의 조카인 고등학생을 소개해 주었다. 다행히도 그녀와 친구가 되니 일본어는 다시 나의 취미가 되었고, 목표하던 1등급도 따게 되었다. 하지만, 쉽사리 나는 과장으로 진급할 수 없었다. 가산점이 있다고 해서 진급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나는 ‘대리’인 채로 회사를 졸업하게 되었다. 진급 누락이란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삶의 이벤트이지만, 항상 자본주의 미소를 띠고 회사로 출근하는 나에게는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큰 마음의 멍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을 보다가, 모지스 할머니(Grandma Moses)를 알게 되었다. 이미 돌아가신 모지스 할머니는 미국에서 80세에 화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 동안 화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내가 생각하던 꿈이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할머니는 80년 동안 열 아이의 엄마, 농부의 아내, 농장 운영자 등 다양한 일을 해 왔지만 명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림은 관절염이 심해지는 바람에 뜨개질을 할 수 없어 시작하셨다고 한다. 당연히 명함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명함이나 이력서에 적을 수 없는 일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20대부터 스펙에 적을 일을 중심으로 살아왔는데, 쉽사리 그 버릇을 버릴 수가 없는 노릇이다. 명함이나 이력서에 적을 수 있는 일은 나의 성과가 된다. 회사에서는 개인의 성과, 팀의 성과를 차곡차곡 모아서 회사의 성장을 이룬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의 성과가 나의 성장과 연결이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제안서를 쓰고, 특허를 내고, 기능 분석을 하면서 성과를 낸 것은 분명하지만 성과만큼 내가 성장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래도 성과를 내면서 얻은 월급과 퇴직금은 참으로 달콤하다.




넝쿨손

          - 이영배


청도 운문사 돌아 오르는 길모퉁이

그곳에 앉아있는 병풍바위

멧돼지 뭉개도 꿈적 않는 그 덩치

담쟁이 넝쿨 슬그머니 등짝을 내어 놓았다


조막손끼리 붙잡고 올라가다

찬바람 몰려와 흔들어대자

잡았던 손 슬며시 놓았네


희망하지 않은 희망퇴직

딸려 나온 명퇴금 솜사탕처럼 달콤하다

한동안 버티지만 바람마다 흔들린다


꿈쩍꿈쩍 발버둥 쳐보지만

별수 없는 빈 털털이


떨다가 떨어지는

할 수 없는 저 넝쿨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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