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멜레옹 Jul 27. 2020

몸이 아프면 애고 어른이고 짜증을 냅니다

나를 짜증 나게 하는 것들을 '무시'하지 마세요

짜증  (명사) 

1. 마음에 꼭 맞지 아니하여 "발칵" 역정을 내는 짓. 또는 그런 성미

예시) 나는 광대가 아직 오지 않는 데 대하여 욕설을 퍼부었고, 짜증 때문에 술을 연거푸 두 잔 비워 냈다.


-표준국어대사전-




요 며칠 아이가 아팠다.  병명은 포경수술을 하지 않은 남아에서 흔히 발생한다는 귀두포피염. 귀두를 감싸는 포피에 염증이 생겨 소변을 볼 때 많이 아파하는데, 아이는 아픈 느낌을 한 번 경험하더니 무섭다며 계속 소변을 참았다. 


몸을 베베 꼬고 힘들어하는 아이를 데리고 욕실 목욕탕 안에 들어가 소변을 보도록 했다. 울며 불며 완강하게 거부하는 아이와 씨름하기를 한 시간 가량. 아이는 결국 너무 많이 소변을 참은 터에 어쩔 수 없이 소변을 봤지만 계속 통증을 호소했다. 기저귀를 떼고 한 번도 실수하지 않던 아이는 급기야 밤에 자다가 이불에 중국과 러시아를 합친 땅만큼 광활한 지도를 그렸다. 


'얼마나 참고 있었으면...'


소변을 잔뜩 보고도 아무것도 모른 채 곤히 자고 있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하루 두 번씩 발라주었지만 하루아침에 낫진 않았다. 아이는 계속 소변을 참았고 울며 불며 할 수 있는 모든 짜증을 다 부렸다. 


"시어시어시어시어시어(싫어 싫어 싫어 싫어!!)"

"아빠 시어! 엄마 시어! 쉬 안 할 거야 무수어."


완강히 거부하는 아이를 부여잡고 소변을 보도록 유도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15 kg 밖에 되지 않는 조그만 아이가 어디서 저런 힘을 만들어내는 걸까. 남편과 나는 며칠간 새벽마다 보채는 아이를 돌보느라 진이 빠졌다. 다행히 약을 계속 바르니 조금씩 통증은 가라앉았고, 드디어 오늘 아침엔 아이가 아프지 않다는 말을 했다. 


휴.


며칠의 고생 끝에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참 아이 하나 키워내는 것이 뭐 이리 힘든지. 생전 듣도 보도 못했던 병명부터 시작해 아이의 투정과 짜증까지... 긴 여정이었다.  




하나의 산을 넘고 나면 또 다른 산이 나온다고, 이번엔 내가 말썽이다. 3~4주 전부터 오른쪽 어깨가 아프기 시작했는데, 나는 며칠 지나면 괜찮겠지 하고 "무시"했다. 그런데 이게 시간이 갈수록 더 아파오더니, 이제는 팔을 드는 것에도, 움직이는 것에도 통증이 전해졌다. 결국 내 '무시'가 일을 키운 것이다.



무시 (명사)

1. 사물의 존재 의의나 가치를 알아주지 아니함.



우리 집 주치의 선생님(남편)께서 '이렇게 해보세요. 저렇게 해보세요. 여기가 아픈가요? 여기는요? 여기는요?' 하면서 진단을 하더니 오른쪽 어깨 회전근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집에 있는 파스 세 개를 연달아 붙여줬다. 가뜩이나 자주 쓰는 오른팔에 문제가 생기니 팔을 위로 들어도 아프고, 옆으로 들어도 아프고, 설거지를 해도 아프고, 요리를 해도 아프고 아주 환장할 노릇이었다. 


미세하게 작은 움직임에도 반복되는 아픔이 전해지니 "발칵" 짜증이 났다. 

오뉴월 독사 새끼처럼 독이 바짝 오른 나는 누가 나를 조금만 건드리기만 하면 짜증부터 났다. 나도 성격이 썩 좋은 사람은 아니란 걸 다시 한번 느끼면서도 아프니까 짜증스러운 기분이 계속 나를 감싸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짜증. 단어조차 짜증스럽게 생긴 것 같은 이 짜증. 나는 어떨 때 짜증을 잘 내는지를 한 번 기록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짜증 나는 이유 아홉 가지를 적어 봤다. 


첫째, 지금처럼 내 몸이 아플 때.

둘째, 아주 가까운 사이(예를 들면 남편과 아들)의 사람이 내는 지속적인 짜증을 받아줘야 할 때.

셋째, 그날이 다가올 때.

넷째, 배가 고플 때.

다섯째, 내 배가 고픈 것(혹은 내 기분)을 아무도 안 알아줄 때.

여섯째, 집안일을 비롯해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때. (그리고 그 일을 내가 다 해야 할 때)

일곱째, 잠이 부족할 때. 

여덟째, 인내심에 한계가 오는 상황에 맞닥뜨릴 때.

아홉째, 인터넷이 안되거나 전화가 안터 지거나 뭐가 제대로 연결이 안 될 때.



나도 사람인지라 짜증을 '벌컥' 내기도 하면서 살아가지만, 이번에 한 가지 느낀 건 내가 느끼는 미세한 감정, 혹은 아픔을 무시하고 지나치면 안 된다는 거였다. 조금 몸이 안 좋고 아프다? 그러면 내 몸을 좀 찬찬히 살펴보고 필요하면 약을 먹던지 치료를 하던지, 운동을 하던지 그에 맞는 적절한 처방이 필요하는 거다. 내 상태를 '무시'하기 시작하면 몸은 벼르고 벼르다가 커다란 짜증 폭탄이 되어 터지지 말아야 할 때 터지고 만다. 


내가 갖고 있는 짜증 폭탄의 씨앗이 무엇인지를 기억한다면, 그리고 그 씨앗이 싹을 틔웠다면, 어서 빨리 그에 맞는 조치를 취하자. 무시하지 말자. 갑자기 '펑'하고 터져 옆에 있던 불쌍한 새우들이 등 터지지 않도록. 








작가의 이전글 감정의 롤러코스터, 동작 버튼은 내손에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