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고통: 외전(4)
언젠가부터 교직사회에서 ‘기분상해죄’라는 말이 유령처럼 나돌기 시작했다. 아이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 정서적 아동학대가 되어서 교사가 처벌받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토록 상식 밖의 일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사회와 교육부와 교육청은 교사의 삶을 내려치는 어이없는 단두대를 방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관료들은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병자의 얼굴을 하고서 “교사의 헌신을 보여주세요”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들의 병은 얼마나 깊은가.
비상식성이 일상이 되었을 때 여기에 맞서는 힘이 ‘해부의 방식’이다. 본질을 덮고 있는 거품을 걷어내고, 현상의 가장 아래에서 작동하고 있는 힘을 발견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해체하는 시도를 시작하는 것이다. 기분상해죄를 해부하는 데 좋은 ‘메스’가 되어주는 것이 르네 지라르의 ‘욕망 모방 이론’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분상해죄’의 가장 아래에는 학부모의 비틀린 욕망과 불안이 자리하고 있으며, 결국 기분이 상한 존재는 아이가 아니라 부모이다.
르네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인간이 어떤 대상을 욕망할 때 그것을 바로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이미 성취하거나 나보다 먼저 그 욕망을 쫒고 있는 ‘타인’을 욕망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욕망은 끝없는 모방을 낳고, 모방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점점 같은 대상을 서로 성취하려는 경쟁의 굴레에 빠진다는 것이다. 욕망과 경쟁의 이중주가 오래 울려 퍼질 때, 우리의 삶은 다정한 폭력에 잠식된다.
오랜 시간 반복된 학벌주의와 대학 서열화로 인해서 우리 사회의 많은 학부모들이 SKY대학이라는 동일한 대상을 욕망한다. 최근 불어닥친 ‘의대 광풍’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욕망 모방’에 찌들어 있는지 보여준다. 이 욕망과 경쟁이 깔때기에 모여서 진득하게 고이는 곳이 바로 교실이다. 내 아이가 공부 외적인 것으로 지적을 받거나, 교실에서 주인공이 되지 못하면 학부모들은 자신들이 설계한 욕망의 코스에서 이탈할지 모른다는 바삭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상식의 범위에서 행동하고, 품격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문제는 품격을 상실한 소수의 학부모다. 이들은 아이가 학교에서 겪은 일에서 ‘자녀의 부족함’보다 ‘자신의 비뚤어진 욕망’을 먼저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다. 자신의 비틀린 욕망을 들키게 될까 봐 과잉 반응하게 되고, 자신이 반복했던 욕망 투영이라는 폭력의 죄를 기어코 교사에게 뒤집어 씌운다. 그렇게 교사는 한순간에 ‘아동학대교사’로 전락하게 되고, 교사는 차가운 단두대 위에 서게 된다.
아이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귀한 존재이다. 교사의 말이 정말 자신의 삶을 위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교사의 꾸지람을 자기 삶에 금방 녹여내고, 그 말과 함께 당시의 기분도 금세 잊어버린다. 그것을 들춰내어서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고, 끝내 “너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아주 기분이 상했던 거야”라는 잔인한 복기를 반복하는 존재는 비틀린 욕망에 잠식당한 학부모들이다.
어딘가에는 분명히 교사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는 판사가 있을 것이고, 그분은 단두대에 서 있는 교사에게 다음과 같은 판결문을 낭독할 것이다.
"(주문) ‘기분상해죄’는 근본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죄이다. 꼭 그 죄를 묻고 싶다면 우리 사회와 교육부, 그리고 갈수록 활개치고 있는 수많은 공포조장자들에게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