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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의 정선생 Jul 24. 2024

백정의 저울과 교사의 상징

교사의 고통: 외전(6)

동물의 살은 인간을 살린다. 소와 돼지와 닭과 양과 오리의 살은 모두 그들의 것이지만, 인간의 손길 앞에서 무력하다. 통통하게 오른 살은 도축의 시간 앞에 한 없이 무력한데, 인간은 동물의 살에서 에너지를 얻어 하루를 버텨낸다.     


동물의 살이 인간의 살이 되고 허기진 몸이 생기를 찾으려면 동물의 죽음을 인간의 생명으로 전환하는 ‘손’이 필요하다. 이 ‘손’이 백정이다. 그런데 육체보다 정신을 숭상하고 일상보다 명분을 중시한 조선시대에서 백정은 천민을 벗어날 수 없었다. 백정은 인간의 삶을 위한 가장 고귀한 일을 했음에도 촘촘히 설계된 신분제의 칼날 앞에 한 번도 고개 들며 살지 못했다.    

 



갑오개혁과 함께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철폐되었다. 이상적인 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늘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크다. 사회는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선언했으나, 그 허위의 말들은 백정의 삶까지 녹아들지 못했다. 백정은 여전히 천한 신분이었고, 양반들에게 비슷한 박해를 받았던 평민들조차 그들을 환영받지 않았다.

     

백정의 삶이 더욱 가혹해진 것은 천박한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삼킨 이후다. 일본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 아니라 말 잘 듣고 온순한 ‘신민’을 원했다. 일제강점기에 백정들은 자신의 이름 옆에 붉은 점을 찍거나 ‘도한’이라는 말을 병기해야 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일본에 유학을 다녀와도 백정은 관리가 되지 못했고, 사람다운 삶을 살지 못했다.     




이 분노가 절정에 달한 것은 결국 ‘자식 문제’였다. 평민들이 백정의 자식과 자신의 아이가 한 학급에 있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저항하자, 백정들은 자신들이 견딘 모진 서러움이 자식에게 그대로 반복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게 해서 일어난 운동이 ‘형평운동’이다. 전국의 백정들은 ‘형평사’를 조직하고 일제의 탄압과 폭력에 저항하여 식민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약자의 삶을 해방하자고 외쳤다.  

   

백정들은 이 외침을 위하여 자신들의 ‘상징’을 만들었다. 형평사의 상징은 다름 아닌 ‘저울’이었다. 저울은 백정이 자신의 본업, 즉 죽음을 생명으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이다. 나아가 사회가 정해놓은 이상(추의 무게)과 실제 자신의 현실(고기의 무게)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끝없이 줄여서 ‘0’에 수렴하도록 만드는 직관적 행위이다. 백정에게 저울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좁히는 상징이자,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자는 ‘비전’이었다. 그래서 형평운동에서 제시한 수많은 이야기는 하나로 매끄럽게 연결될 뿐, 꿰맨 자국이 없다.     




교사에게도 이러한 상징이 필요하다. 《교사의 고통》을 출간하고,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그런데, 상징이 왜 중요한가요?”이다. 상징은 다수의 사람을 연결하는 확실한 ‘이미지’이다. 50명이 넘지 않는 부족사회에서는 상징이 없어도 ‘공동체’를 꾸리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사람이 공동체를 꾸리려면,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상징’이 필요하다. 그 상징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의사소통하며 공동체를 꾸리는 것이다. 인간은 결국 동물의 살과 상징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제 교사들의 상징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백정이 수많은 차별과 박해에 저항했듯, 교사도 넘쳐나는 고통과 반복된 고립에 저항해야 한다. 그 시작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 상징을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서로 연결되는 일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마음속에는 어떤 상징이 움트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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