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고통: 외전(7)
가시는 서럽다. 가시는 원래 물고기의 탄력 있는 움직임을 견고히 잡아주는 뼈의 일부이다. 그런데 물고기를 지지고 볶고 삶고 데치면서 살과 뼈는 흐물거린다. 흐물거림 앞에서 살과 뼈는 ‘산산조각’ 나고, 그렇게 뼈는 한순간 가시가 된다. 연결성과 맥락을 잃어버리고 홀로 부유하는 ‘가시’는 정처 없이 흘러 다니게 되고, 결국에는 사람의 목을 잔인하게 찌른다.
전문적학습공동체의 본질도 원래는 ‘뼈’에 가깝다. 미국은 공립학교 교사들의 전문성 신장을 위하여 장기적인 안목과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Professional Learning Community’라는 정책을 추진했고, 교사들은 이 공동체 안에서 철학과 삶을 함께 길렀다. 그런데 교육부와 교육청의 수입상들은 이 뼈가 지닌 맥락과 철학은 보지 않고, ‘전문적학습공동체’라는 이름만 그대로 번역하여 수입하였다. 그렇게 ‘전학공’은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가시가 되어’ 교육현장으로 내려왔다.
외국의 정책과 이론을 도입할 때는 반드시 ‘재맥락화’가 필요하다. 이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철학과 연결성을 찬찬히 분석하고, 이를 우리나라의 맥락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는 다정한 시간이다. 그렇게 증류의 과정을 거쳐서 우리의 땅에 맞는 말이 나왔을 때, 천천히 교육현장에 내려야 한다.
인간은 결국 언어로 사고하는 존재이다. 교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정책을 접할 때, 그 정책이 지닌 ‘이름’이 교사들의 인식과 감정의 대부분을 결정한다. 이토록 중요한 일임에도 오랜 시간 활약한 수입상들은 ‘직역’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수입상들은 자신들이 외국의 이론을 우당탕탕 수입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정책이 품고 있는 가시를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숨겨놓고, 교사들에게 "괜찮아요, 일단 꿀꺽 삼키세요!"라고 닦달한다. 그러나 가시는 반드시 목에 걸리게 되어있다. 지금 교사들에게 전학공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한 정책이 되어버렸다.
불편함의 본질은 역시 ‘언어’에서 시작한다. ‘전문적’이라는 말은 일상의 이야기와 교사의 삶을 전학공에서 추방했고, ‘학습’은 교사를 여전히 계몽의 대상으로 선언하고 있는데, 이러한 거부감이 겹쳐서 전학공은 학교의 일과로서 존재하는 업무 ‘공동체’로 전락했다. 결국 ‘전문적’, ‘학습’, ‘공동체’는 하나로 연결되어 ‘뼈’가 되지 못하고 각자 흩어져서 정신없이 부유하는 ‘가시’로서 교육 현장에 떠돈다.
그렇다면, 교사들은 ‘전학공’이라는 완벽한 가시를 어떻게 해야 할까? 전학공의 본래 철학을 회복하고, 이를 우리 사회의 맥락과 연결하여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전학공’을 이루는 세 단어가 흐물거리는 가시가 아니라 견고한 뼈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을 어떻게 하냐고? 나는 ‘전문적에서 일상적’으로의 전환, ‘학습에서 이야기로의 전환’, ‘업무 공동체에서 벗 공동체로의 전환’을 제안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하나씩 연재하고자 한다. 하나로 연결된 뼈는 결코 가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