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고통: 외전(9)
이광수의 글은 ‘여백 없는 빛’이다. 한때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독립운동에 몸담았던 그였으나, 정신적 지주였던 안창호 선생이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고 그 후유증으로 죽음을 맞는 모습을 보면서, 여린 이광수는 우리나라가 절대로 독립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졌으리라. 의심을 허락하지 않았던 그 신념 앞에서 이광수는 거대한 태양(욱일기)을 향해 돌아선다.
일본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태양은 그가 오랜 시간 찾아 헤맨 빛이었기에, 그 빛에 기대어 우리 민족의 무지몽매함을 떨쳐내자는 글을 쓴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야 하며, 약자에서 강자로 거듭나야 하고, 끝없는 축적과 성장을 이룩하자는 이광수의 외침은 수많은 조선인 삶을 죽음으로 몰았다. 그가 말한 밝은 세상은 깨우침과 수량화로 양념된 강자들의 세상이었다.
권정생의 글은 ‘여백을 향한 어둠’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 ‘약자’이며, 시대가 주목하지 않는 소외된 삶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들이다. 어린 시절 얻은 병으로 평생 약자의 삶을 살아간 권정생은, 우리 삶을 구원하는 것은 거대한 ‘빛’이 아니라 일상을 스며 있는 어둠과 당당히 마주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이야기’는 중요한 장치이다. 《몽실언니》의 몽실이는 가장 잘 듣는 존재이자, 자신의 일상을 이야기로 전환하는 인물이다. 이야기 속에서 어둠은 숨겨놓았던 고개를 내밀게 되는데, 그 마주함에서 약자들의 상처가 치유된다. 결국 어둠은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삶의 빛과 연결될 뿐이다.
지금 교육청에서 말하는 전학공의 ‘학습’은 계몽의 방식이자 빛의 방식이다. 어둠을 빛과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조지는(!)’ 방식이다. 교사의 삶에 진득하게 고여있는 무수한 상처(어둠)와 마주하지 않고 그것을 빛으로 덮는 오랜 관성이다. 이는 교사를 여전히 계몽의 대상으로 상정하고 연수와 기법과 이론을 욱여넣어 방식인데, 그래서 교사는 끝없이 ‘외부의 것을 학습’ 해야 하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철학 없는 의무 연수와 뜨고 지는 교육 기법과 정신없이 몰아치는 강사들의 콘텐츠 앞에서 교사들은 진정한 ‘공부’는 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연수를 듣고 강의를 들어도 내면에 자리한 거대한 구멍은 메워지지 않는다. 그 허무는 교사로 살아오는 시간 동안 축적된 상처와 고통으로 생긴 어둠이기에, 그것과 마주하지 않으면 교사의 ‘학습’은 결코 공부가 될 수 없다.
그러니, 이제라도 전학공의 ‘학습’은 ‘이야기’로 전환되어야 한다. 교사들이 겪고 있는 일상의 이야기와 상처를 이야기의 형태로 솔직하게 내어놓고, 그것을 어떻게 이겨낼지를 함께 고민하는 ‘이야기’ 공동체를 꾸려야 한다. 그렇게 내어놓는 내면의 어둠이 푸념 대잔치나 고통 경진대회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이야기에 깃든 어둠을 학교의 문화로 극복하려는 토론으로 이어져야 한다. 문화에 대한 토론 역시 거창한 것이 아니다. 교사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소소한 프로젝트 수업을 함께 설계하고, 교사의 일상을 나누는 문화를 들여놓으며, 교사의 삶을 지키는 관리자의 메시지가 학교의 일상이 되도록 만드는 일이 그것이다. 우리네 삶을 가꾸는 치열한 고민, 그것이 바로 ‘문화’이다.
이광수의 글은 오래전에 죽었다. 그러나 권정생의 글은 여전히 살아있다. 권정생이 남긴 이야기는 아이들의 고운 손을 거쳐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전학공이 교사에게 학습과 성장을 강요하는 한, 이 정책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학습보다 이야기를, 성장보다 연대를 강조해야 그나마 남아있는 전학공을 살릴 수 있다.
이제 교사는 선택해야 한다.
무엇을 볼 것인가를 말이다.
빛을 볼 것인가?
아니면 어둠을 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