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고통: 외전(10)
이제 전학공에서 가장 중요한 ‘공동체’에 대해서 말할 차례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학공에서의 '공동체'는 지금의 ‘업무 공동체’에서 ‘벗 공동체’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학교에 들어온 정책은 대부분 ‘업무’의 형식으로 왜곡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취지를 가진 ‘이야기’도 일단 ‘공문’에 찍혀서 내려오면, 그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업무’의 세계로 편입된다. 구성원들이 그 정책의 본질에 대해 오랜 시간 숙고하지 않는 한 이는 필연의 편입일 것인데, 학교는 이러한 숙고를 하기에 이미 비정상적으로 바쁜 공간이 되었다. 업무가 되어버린 전학공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늘 그렇듯, 답은 우리 안에 있다. 우리 민족이 추구한 공동체는 '업무 공동체'가 아니라 ‘벗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는 공동체의 서사를 압축해서 표현한 신화를 비교하면 명확히 알 수 있다.
서양의 신화에서 ‘오디세우스’는 영웅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그의 삶을 동경한다. 그러나 실제로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그의 모습은 ‘구분하는 자’에 가깝다. 그의 삶은 ‘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으로 작동한다. 그에게 ‘곁’은 없다. 자신을 알아보고 먼저 고개를 숙이는 자는 편으로 삼지만, 그게 아니면 처단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삶은 그가 부하들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반복된다.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10년의 시간 동안 오디세우스에게 부하들은 그저 ‘동원되는 존재’ 일뿐이다. 그 유명한 ‘세이렌’과의 만남에서도 부하들은 오디세우스의 욕망을 위해서 동원될 뿐이다. 요컨대, 오디세우스 공동체는 지시와 이행으로 이루어지는 업무 공동체일 뿐이다. 20년의 세월 동안 함께 했던 동료와의 이야기가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오디세우스의 서사는 지금 우리 학교의 전학공의 모습과 정확히 겹친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전통 신화에 등장하는 ‘바리데기’는 소박한 시민이다. 그녀는 자신을 버렸던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 위해서 자발적으로 저승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 여행의 과정에서 만난 이웃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경청하고, 그 삶을 자신의 삶과 연결한다. 그렇게 바리데기는 여행에서 만난 존재와 벗이 된다. 이승으로 돌아온 바리데기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구할 뿐 아니라, 그녀를 박해했던 다른 자매들과 함께 승천하여 북두칠성이 된다. 그러니 바리데기의 삶은 개인으로 시작하여 공동체로 마무리된다. 바리데기의 삶은 ‘진정한 구원’은 단순히 자신의 일을 잘하는 것으로는 결코 이를 수 없고, 일의 의미를 함께 음미할 벗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지금 학교 현장의 전학공은 폐허와 같다. 이름만 걸고 있을 뿐, 실체는 보이지 않는 허울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학공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공동체’를 먼저 살리는 것 말고는 없다. 다시 말해, 전학공의 시작은 ‘전문적’에 있지 않고 ‘공동체’에 있어야 한다. 먼저 공동체를 만들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내용과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어도 그것은 교사의 삶으로 스며들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교사 공동체를 ‘벗 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가장 시급한 것이 '짐 나누기'와 '눈 빛'이다. (1) 먼저, 업무에서 벗으로 전환하는 가장 중요한 힘은 전학공이 누군가의 '독박'으로 굴러가는 것을 멈추는 일에서 시작한다. 지금 대부분 학교의 전학공은 업무 담당자의 것이다. 담당자가 그 무거운 짐을 일 년 동안 짊어지고 간다. 이제는 그 무거움을 동학년이나 학년군으로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학년(군)에서도 부장이나 특정 리더가 계속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꾸린 동료교사들이 돌아가면서 진행해야 한다. 일상 이야기, 영화 이야기, 책 이야기 뭐든 좋다. 교실에서의 고민이면 금상청화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과 일상과 고민을 내어놓고 그것을 함께 이야기하다 보면, 수업과 교육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해도 하는 것이 교사들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2) ‘눈 빛’이다. 업무는 진심을 숨겨야 잘 된다. 그러나 벗이 되려면 ‘진심’을 꺼내놓아야 한다. 진심을 동료에게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눈 빛’이다. 교사는 진심을 말하는 사람의 눈빛을 정확히 간파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오랜 시간 복잡하게 얽힌 사람들의 관계망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기에 허심과 진심을 누구보다 정확히 구분하는 전문가가 바로 교사이다. 서류에 파 붙어 있던 눈을 들어 동료의 눈과 진지하게 마주하는 문화, 이것을 만드는 일이 관리자와 교사의 몫이다.
결국 전학공은 수업이나 이론이나 기법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일상에서 시작한 진심은 반드시 동료의 얼어붙은 가슴을 녹여낼 것이고, 그 녹임의 시간 앞에서 견고한 분리의 장막은 걷힐 것이다.
당신의 곁에 있는 동료는 누구인가?
업무 담당인가가?
아니면 벗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