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고통: 외전(11)
교사로 사는 일은 무력감과 춤추는 일이다. 그러한 무력감 중에서도 내가 가장 아리게 느꼈던 것은 ‘역사에 대한 무력감’이다. 교사는 아이들과 역사로 대화하는 사람이자,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이는 역사에 대한 사실과 함께 그것이 묻어놓은 ‘진실’을 우직하게 찾아 나가는 일이다. 그래서 교사에게는 역사에 대한 균형감 있는 지식과 함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안목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이러한 균형적 지식과 안목을 갖기 어렵다. 우리는 ‘편집된 근현대사’만 배우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우리 민족은 좌와 우로 분열되었고, 그 분열을 틈타 정치적 욕망에 눈이 먼 사람들이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곧이어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이 닥쳤고, 이후 오랜 시간 이어진 독재와 군부 정치는 사람다운 삶과 평등한 세상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에 재갈을 물렸다. 재갈을 물리기 위해서 자행된 무차별한 학살과 입막음의 역사는 자연히 ‘침묵’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러한 일들은 분명히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영역이 아닌 함구의 영역으로 추방되었다. 나도 제주 4.3의 진실을 어른이 되고 나서야 어렴풋이 접하게 되었다.
제주 4.3은 상식적인 저항이자, 약자를 위해 연대한 시민들의 정당한 외침이었다. 미군정은 우리나라가 독립 국가로 자립하는 것보다 통제에 잘 따르는 국가로 남길 원했기에, 일사 분란한 통제에 능한 친일파 인사를 다시 불러들여 경찰의 주요 인사로 배치한다. 거대한 태양(욱일기)에 복종하던 권력자들은 약자들의 삶에 관심이 없었고, 경찰의 말발굽에 아이가 치이는 사고가 발생해도 아무런 해명조차 하지 않았다. 제주 시민들은 이들의 비상식성에 울분을 토하며 여기에 대한 해명과 정당한 조치를 요구했으나, 경찰은 오히려 총격을 가하며 과도한 진압을 사작한다. 이후 시민들의 봉기가 거세지자 정부는 서북청년단과 군대를 보내서 제주 시민을 무차별 학살한다. 이러한 비극은 1947년에서 1954년 걸쳐서 오랜 시간 자행되었으나, 제주도의 시민들은 어떠한 지원과 구제도 받지 못하고 철저히 고립되었다. 고립은 이토록 무섭다.
제주 4.3이 그토록 잔인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도 ‘고립’에 있다. 지금처럼 교통편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의 제주의 이야기는 육지 사람들의 삶에 닿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제주 4.3을 공부하고 관련 자료를 읽으면서 ‘고립’된 존재가 어떤 고통과 아픔을 삼켜야 하는지 다시 한번 절감했다. 그리고 이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교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학교에 개인주의와 계량주의 문화가 들어오면서 교사는 철저히 고립되었다. 과거에는 아무리 교사가 혼자 틀어박혀 있고 싶어도 선배들이 가만히 두지 않았다. 선배들은 언제나 “밥 먹자, 커피 마시자, 팥빙수 먹자, 어묵 먹자, 수박 먹자, 포도 먹자, 딸기 먹자, 유산슬 먹자, 떡 먹자”라며 후배를 챙겼다. 동학년 교사가 힘든 일을 겪으며 교실에 축 늘어져 있으면, 닌자처럼 다가와서 오랜 시간 고민을 들어주었다.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선배 교사들은 여전히 후배를 아끼는 교사였고, 후배에게 시키기보다 자신들이 먼저 헌신했으며, 불필요한 간섭보다 자신의 품을 내어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공동체 문화, 선후배 문화가 학교에서 사라졌다. 공동체와 선배를 상실한 존재는 필연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다.
제주 4.3의 고통은 현재 진행 중이다. 정부는 오랜 시간 침묵했고, 그 고통을 치유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더디다. 고통은 그것을 겪은 시점을 기준으로 가급적 빨리 치유되어야 회복도 빠르다. 치유가 느릴수록 그것은 똑같이 반복되는 아픔으로 남게 되고, 그 아픔이 고립을 부추긴다. 이 반복과 고립을 우리는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교사들이 겪고 있는 상처는 사람과 욕망의 복잡한 연결망에서 온 것이기에 교사의 영혼을 통째로 뒤흔드는 강한 고통을 남겼지만, 이는 오랜 시간 방치되었다. 거기다 개인주의가 부른 고립의 문화는 이러한 교사의 고통이 자신의 내면에 진득하게 엉겨 붙도록 만들었다. 영혼을 갉작이는 아픔이 반복되지만, 그것을 치유할 길 없이 철저히 고립되어 있는 교사의 고통은, 그래서 ‘트라우마’에 가깝다. 이러한 트라우마가 겹친 사람의 삶은 끝내 꺾이게 된다. 제주 4.3을 지나온 무수한 사람들의 삶처럼 말이다.
교사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극복하는 일은 고립을 극복하는 일과 같다.
고립을 극복하는 일은 고립된 시간의 본질과 마주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니, 교사는 고립의 시간을 해부한 현기영 작가의 시선과 만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