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의 풍경은 조금 낯설지만

- ‘해야만 하는 일’이 사라지고

by 프로불평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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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를 하고 나서 가장 많이 달라진 게 뭘까.
9년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고들 하지만, 사실 나는 그보다 훨씬 오래 일만 해왔다.
이전 회사에서 쉬지 못하고 바로 다음 회사로 옮겼기에, 이번은 정말 오래간만에 맞이하는 '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처음 백수 생활을 시작했을 땐, 어떤 하루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나이도 있고, 이직에 대한 걱정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래 일했으니 실업급여를 받는 이 기간만큼은 조금은 나에게 너그러워져 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스스로에게 허락한 쉼이었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사라졌다

회사에 다닐 땐 하루하루가 ‘must’였다.
정해진 시간에 눈을 떠야 했고, 정해진 옷을 입고, 정해진 자리에 앉아 정해진 일을 했다.
그 중간중간에는 늘 예상치 못한 일이 끼어들었다.
새로운 업무가 주어지고, 돌발상황이 생기고, 그럴 때마다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졌다.

일정은 내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끊임없이 내 시간 안으로 들어왔고, 나는 그 안에서 최대한 흔들리지 않으려 버텼다.
그러다 어느 날, 그 모든 것이 멈췄다.

지금은 내가 나의 시간을 설계한다.
물론 풀어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와 약속한 루틴을 지키고 있지만, 그 일정마저도 내가 만들고 내가 채워가는 과정이라는 게 묘하게 기분이 좋다.




태양을 마주하는 하루

야근이 잦았던 나에게 태양은 종종 ‘낯선 존재’였다.
해가 짧은 계절이면, 별빛을 보며 출근하고 다시 별빛 아래서 퇴근하는 삶.
어둠 속에서만 존재하는 사람, H. G. 웰스가 쓴 과학 소설 '타임머신'에 등장하는 '몰록'이라는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회사 책상이 창가 자리에 있으면 그나마 나았지만 창문 하나 없는 자리에서 하루를 보내는 날엔 이곳이 어디인지, 내가 지금 어떤 계절 속에 살고 있는지도 잊을 만큼 멍해졌다.

하지만 백수인 나는 태양이 떠 있는 시간에 거리를 걷고, 햇살 아래에서 커피를 마시고, 노트북을 펴고 글을 쓴다.
그 순간만큼은 “아, 내가 살아 있구나” 싶은 기분이 든다.




낮에도 사람들이 있다

회사를 다닐 땐 늘 그렇게 생각했다.
“낮 시간에는 모든 사람들이 회사 안에 있겠지.”
하지만 아니었다.
낮의 거리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젊은 커플, 조깅을 하거나 마트 장을 보는 사람들, 그 모습이 너무도 당연한 듯 보여서 나는 한동안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내가 몰랐던 삶의 리듬이 이 시간 속에서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한동안 나는 길을 걸을 때마다 그 공간을 함께 걷고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습관이 생기기도 했다.




공간이 다르게 느껴진다

평일 낮의 카페는 조용하다.
좋아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고, 커피 향이 여유롭게 퍼진다.
영화관, 서점, 도서관… 어딜 가도 공간엔 ‘틈’이 있었다.
그 틈이 주는 여유로움이 너무 좋았다.

그러다 주말에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보면 그 여유로움은 사라지고 모든 공간이 꽉 채워져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와 움직임에 내 마음이 먼저 지쳤다.

오히려 평일 낮, 그 고요한 틈 속에 있을 때 나는 내가 나로 돌아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 느껴본 ‘행복하다’는 감정

마지막 출근을 했던 날은 금요일이었다.
그다음 날은 주말.
나는 오랜만에 여유롭게 늦잠을 자고, 하루를 천천히 흘려보냈다.

저녁 무렵, 마당에 캠핑의자를 꺼내놓고 엄마와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밤이 내리고 조명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 불빛이 화단의 꽃들을 비추는 모습을 보던 순간, 나는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아... 행복하다.”

무덤덤한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누군가 내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도 그 조용한 저녁, 엄마와 마주 앉아 있던 그 마당을 떠올릴 것이다.
그 감정이 ‘처음’이라서 스스로도 놀랐던 날.




그리고, 불안도 있다

물론 걱정이 없다고는 못 하겠다.
나이도 있고, 이직이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한켠으로는 늘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 걱정을 잠시 내려두고 싶다.
오랜만에 쉬게 된 나에게 조금은 따뜻해지고 싶다.
이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도 괜찮다고 나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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