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눈을 뜨니 5시 30분이다. 창밖의 새벽 미명을 피곤한 얼굴로 바라본다. 거실등을 켜지 않은 채 성큼성큼 화장실로 들어가 소변을 보고, ‘6시에 일어나야 되는데’ 생각하며 이불 속으로 다시 쏙 들어갔다. 이불 속은 따듯하고 평화롭다.
전기세 아낀다고, 오랫동안 살아온 곳이라는 이유로, 불도 켜지 않은 집안을 더듬거리다 모서리에 새끼발가락을 찧어 골절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뜬금없이 거실에 작은 전등이라도 켜놓고 자야겠다는 생각을 따듯한 이불 속에서 해 본다.
뚱뚱한 사람보다 마른 사람이 골다공증에 걸리기 쉽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살이 뼈를 보호하는 역할도 있겠지만 운동을 안 하면 그 역할도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인체는 참 신비스럽다.
그런고로 많이 먹고 체중을 늘리고 싶은데 먹으면 배부터 볼록 나오는 볼썽사나운 몸매에 환멸을 느끼고, 결심은 얼마 못 되어 흐지부지되고 만다.
“당신 늙었고, 살쪄도 아무도 관심이 없어.”라는 남편의 빈정대는 말에,
“누가 관심 바라나? 내가 나를 보잖아, 내가 알잖아.”
“건강이 더 중요하지.”
“그렇지 건강이 중요하지.”
젊을 땐 하루가 지나면 피곤했던 몸도 금방 풀렸었다. 근데 나이가 드니 2-3일이 자나야 슬슬 풀리기 시작한다. 이것도 참 신비스럽다. 늙으면 왜 그렇게 되는지, 모두가 다 아는 그런 거 말고 새로운 답이 없을까?
며칠 전 고향에 사는 언니가 전화를 했다.
“응~ 언니 집이야?”
“아니 서울이야, 몸이 안 좋아서 서울대병원에 왔는데 췌장암이란다.”
울먹이는 언니 목소리에 잠시 멍했다. 내 가족이 아닌 이웃 사람의 암 소식에는 위로할 말도 잘도 나오더니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태도에 더 충격을 받은 언니.
“젊은 의사가 글쎄 나한테 와서 한다는 말이 ‘췌장암 3기예요.’ 그래서 ‘나 죽어요?’ 했더니 가만있더라고, 그게 의사냐? 젊은 놈이 환자에게 직접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거야?” 이 말에 흥분한 나는 잠시 혼란스럽던 맘을 가다듬어,
“뭐 그런 인간이 있어. 의사가 돼먹지 않았네.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어야 했는데 지 가족이라도 그리 말할까?” 씩씩거리며,
“세상에 할 일이 남아 있으면 더 살고, 할 일이 없으면 하나님께로 가는 거지, 근데 언니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잖아요.”
암 환자는 자신의 상태를 모를 때는 평소처럼 생활하다가도 암 선고를 받고부터 두려운 나머지 병이 더 악화된다는 통계가 나와 있는데 의사라는 사람이 환자에게 덜컥 말해버렸으니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얼마나 두려울까 못된 인간 같으니라고.
얼마 전에 끝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열연했던 젊은 의사들의 인격을 떠올렸다. 함께 안타까워하며 용기로 다독이는 젊고 잘생긴 의사들, 그렇게 잘생기고 자상한 의사들에게 진료를 받으면 아픈 곳도 잊을 것 같은데. 드라마를 보는 내내 작가의 심성을 보는 듯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의사라면 냉철하기도 하고 슬기롭고 지혜로워야 한다. 의사가 되려고 고달픈 공부를 했음에도 슬기로움은 배우지 못했나 보다. 의사 자격이 있는 사람은 환자의 육신의 병은 물론 마음의 병까지도 치료할 줄 알아야 한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암 환자들과 가족들은 의사들의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경험한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조직검사 결과 다른 곳으로 전이가 안 됐다니 얼마나 감사한지. 항암치료를 해야 한다면 언니가 견딜 수 있을는지. 모든 사람에게는 암이라는 세포가 존재한다고 한다. 스트레스로 인한 면역이 떨어질 때 약한 부분에서 발명을 한다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는 것.
언니가 결혼하기 전이었으니까 25세쯤 되었나 보다. 언니보다 11살 아래인 나는 여러 사건을 통해 보건대 언니에게는 밉살스러운 짓으로 괴롭혔던 것 같다.
엄마는 항상 큰 양푼에 세 사람이 먹을 분량의 밥을 담아 언니랑 나랑 함께 먹었다. 나는 잔꾀를 부려 언니보다 먼저 숟가락을 놓기 위해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그릇 바닥이 보이면 슬그머니 일어나 울타리 밖에 있는 푸세식 화장실에 들어가 앉아 있었다. 그 냄새나는 곳에서 냄새를 맡으며 앉아 있는 것보다 설거지가 싫었던 이유가 뭘까?
옷에도 머리에도 똥냄새가 밸 것 같았다. 곤욕스러웠지만 숨도 참으면서도 꼼짝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공사판에서 쓰다 버린 판자로 지은 화장실. 벌어진 틈새에 눈을 고정하고 멀리 보이는 부엌문을 주시하며 집안 분위기를 살피면서 앉아 있노라면,
“너 여기 있지!” 약 오른 언니 목소리에
“응, 언니 나 똥 싸고 있어.”
“웃기지 마, 이 간나야, 설거지하기 싫어서 그런 거 다 알아!”
“아니야 진짜야.”
“빨랑 안 나와? 오늘 설거지는 네 차례야.”
그랬다, 오늘 설거지 당번은 나였다. 하루씩 하기로 약속했던 것을 나는 반칙을 했던 거다. 치사하게, 무슨 배짱으로 얌체 짓을 하려 했는지, 그러니 미움받을 수밖에. 언니는 내속을 알고 있다는 듯 듬성듬성 속이 들여다보이는 화장실 문을 발로 차며 겁을 주고 소리쳤다. 어쩔 수 없이 부엌으로 끌려와 우당탕 심통을 부리면서 설거지를 했고, 사기그릇들이 부딪치는 소리는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이 와그랑 와그랑. 엄마는 “그래서 그릇이 깨지겠냐”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마디 하셨다. 참으로 못난 행동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여기까지 와보니 가끔 즐거움을 꺼내보는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그때 내 잔꾀가 성공했더라면, 판자로 지은 푸세식 화장실이 아니었더라면, 언니가 내 속을 알지 못했더라면, 이 나이에 미소 지을 추억거리가 만들어졌을까?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많아도 언니와의 추억인 이 사건은 더 늙어도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젊었을 때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 있다. 나이가 들었을 때를, 죽음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딛고 있는 자신을, 왜 이렇게밖에 살지 못했나를 어느 날 문득 실감하게 된다는 걸.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 이후에 맞게 될 심판이 무서워서란다. 좀 더 일찍 깨달으면 좋았을 것을 늙고, 병들고, 외로울 때에야 알아지는 나약함이라니, 참 인간은 불쌍하다.
누구라도 암에 걸릴 수 있다. ‘하필이면 내가 왜’라면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시간들을 보내며 두려움과 갈등과 타협하는 떨림 속에서 자신을 찾아간다.
누구나 어느 날 사라진다.
삶이란 어둠 속에 눕고 일어섬의 과정일 뿐 이미 정해진 길을 걷는 거다. 죽음에 대한 느긋함은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누리는 축복인 것 같아, 그렇지 못한 스스로에게 부끄러움과 부러운 도전이 되기도 한다. 사는 게 뭔지 끝없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신만의 해결 방법을 찾다가 결국 내려놓음을 통해 오랫동안 도둑맞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후회로 한숨으로 고뇌하는 게 인간이다.
아무도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이제 나이 들었으니 어쩔 수 없어’가 아니라, 아쉬움이 절절한 후회로 자신을 괴롭히기보다, 살아온 만큼 경험한 만큼 성숙함의 힘을 보여줘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