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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로니에 May 13. 2019

모나리자 이야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서거 500주년 기념

토요일 저녁 루브르 박물관에 방문했다. 착해서 바로 닌텐도 오디오 가이드를 빌려 모나리자 방으로 이동했다. 모든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다. 모나리자 방이 가장 복잡하기 때문에 그 방부터 본 후에 다른 작품들을 천천히 보는 것이다.  15년 만에 보는 모나리자는 더 보완이 철저해졌리모델링 공사와 수많은 관광객들로 정신이 없었다.

긴 줄을 서서 입장

마지막 코스인 기념품샵에서 초등학생 아들이 고른 모나리자 책을 토대로 정보를 나누고자 한다.


모나리자는 리사 부인이란 뜻으로 이태리에서는 남편 이름을 따서 La Gioconda 라 지오콘다= 지오콘다 부인, 프랑스에선 지오콘다의 불어식 이름 La Joconde 라 조콩드 (조콩드 부인), 미국과  영국에선 모나리자(리자 부인) 라고 불린다.

리자 부인은 1479년 6월 15일 이탈리아 Florence 출신이다. 그녀의 가족은 토스칸의 일부 땅을 소유한 귀족이었다. 리자가 14살 연상의 남편 Gioconda와 1496년 결혼하면서 더 큰 부를 얻었다. 이들 사이에 4명의 아이가 있었고 아주 아름다웠다고 한다. 1542년 7월 15일에 사망했다. 이 시대에 귀족들의 초상화가 많이 그려진 시기인데 그땐 사진기사가 없었던 시기라 유일하게 얼굴을 남기는 방법이 화가를 불러 초상화를 남기는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레오나르도는 굉장히 유명한 화가였기 때문에 그의 초상화를 얻기 어려웠다고 한다. 유명한 왕자들도 그의 초상화를 얻고 싶어 할 정도였다고. 리자의 남편이 레오나르도와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기에 레오나르도의 초상화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리자 남편의 권력과 부를 짐작 할 수 있는 대목이다.

모나리자는 1503년에 이태리 Florence에서 그려졌고 당시 리자는 24살이었다. 한때는 모나리자가 남자라는 소문이 있었다. 허나 당시 시대 배경상 남자가 여장을 하고 초상화를 그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녀의 웃음에 대한 해석도 다양한데 몇몇은 그녀가 임신을 해서 웃고 있는 거라고 하나  정확히 어떤 의미의 미소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어떻게 모나리자가 유명해졌을까?

1525년 레오나르도가 죽은 지 6년 지난해에 그의 제자 Salai 가 모나리자의 카피본을 그렸고 그 제목을 모나리자라고 붙였다. 참고로 이 제자는 레오나르도의 사망 이후 모든 작품들을 보관했었다. 100년이 지난 1625년에 이탈리아 수집가 Cassiano dal Pozzo가 모나리자 작품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모나리자 중 하나" 라고 그 작품을 칭했다. Cassiano 를 통해 루이 14세가 이 작품을 보게 되면서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칭했고 보물들 중에 하나로 여겼다고 한다.  베르사이유 궁전 내 루이 14세 침실에 걸려있다가 1797년 루브르 궁전이 박물관으로 바뀌면서 모나리자가 옮겨졌다.

모나리자 카피본 1001점 중에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된 모나리자 카피본만 150개에 달한다고 한다.

제자가 그린 작품은 스페인 마드리드 미술관에 전시 중. 도난 사건

1911년에 1번 도난당한 적이 있는데 2년 후 1913년도에 이태리에서 이 작품을 회수해 왔다고 한다. 그 이후 보완이 강화되었고 2번에 세계전쟁 때는 비밀 보완 장소에 따로 대피를 시켰을 정도였다. 1974년도부터 모나리자의 작품상태와 기후를 고려해 유리 액자에 보관하였으며 2005년도부터는 멀리서도 볼 수 있게 더 높은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2009년 프랑스 국적신청이 거절된 여성이 모나리자에 커피잔을 던지는 사고가 있었으나 방화유리 덕에 그녀는 안전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누구인가?

Léonard de Vinci = 빈치에서 온 레오나르도 라는 뜻이다. 빈치는 이탈리아 플로렁스 Florence 근처의 도시로 예술가들의 수도라 불리는 곳이다. 레오나르도는 이곳에서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배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수학,지리,새의 날갯짓 등 다방면에 흥미를 갖고 공부를 했으며 밀라노로 가기 위해 플로렁스를 떠났다. 그 후 로마로 이동했고  지인의 초대를 거절하지 못하고 고령의 나이로 1516년 프랑스  Amboise에 도착하게 된다. 모나리자를 포함해 총 3점의 작품을 프랑스로 가져왔다고 한다. 3년  1519년 3월 2일 Chateau de Clous에서 사망했다.  이곳을 방문하면 그가 살았던 집을 볼 수 있다.

2019년 가을 루브르 박물관에서 다빈치 서거 500주년 기념 전시회가 열리는데 6월 18일부터 온라인으로 티켓 예매를 시작한다. 루브르 하루 평균 관광객 수가 3만 명인데 이 전시로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릴 것을 우려해 매 시간대로 예약해야 한다고 한다. 이 전시회로 사실 이태리와 프랑스 간에 신경전이 있었다. 위에서 언급했듯 레오나르도는 3년을 프랑스에서 거주했다. 마지막 생애를 프랑스에서 마감하면서 그의 작품들이 프랑스에 남겨졌고 그의 제자 Salai가 적은 돈을 받고 프랑스에 기증하면서 그의 작품들이 프랑스 소유가 된 것이다. 그는 이태리인이며 많은 작품을 이태리에서 그렸기 때문에 두 나라 간 신경전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나리자에 대한 응용 카피는 그녀의 탄생 이후 지금까지도  이루어지고 있다. 조선시대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를 한국의 모나리자라고 부른다. 모나리자가 전 세계에 미친 영향을 비교해보아 미인도도 우리나라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를 보면서 대체 리자 부인이 뭐길래 저러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500년이 지나도록 우리 입에 오르내리는 이 작품의 영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브르박물관이 1793년 10월 10일에 오픈해 올해가 226주년 해라고 한다.

https://www.facebook.com/museedulouvre/videos/487278542031075/


"루브르 섬" 책에서 한국어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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