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 시작된지도 벌써 2주가 다 되어간다. 요즘따라 날씨가 변덕스럽다. 비가 오는 날들이 잦아졌다. 하루 종일 내리기도 하고 잠깐 동안 머물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밥을 먹기 전에는 분명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밥을 먹고 나니 하늘이 다시 맑아진 날도 있었다. 오늘은 에어컨을 켜야 할 정도로 햇빛이 뜨거웠는데 내일은 또 비가 온단다. 몬트리올의 가을은 늘 이런가? 작년에도 이랬나? 싶은데 기억이 없다. 작년 이맘때쯤 나는 굉장히 행복했던 하루하루를 보냈는데도 말이다.
작년의 9월은 내가 어학원에서 보냈던 기간 중에 가장 행복했던 달이었다. 새로운 나라에 홀로 적응해야 했던 8월 내내 늘 붙어 다니는 단짝을 바랐던 나는 운이 좋게도 단짝을 만들었고 항상 그 친구와 수업을 들었다. 여전히 낯을 가려 사람들을 대하는 일은 똑같이 어려웠지만, 그래도 학교에 가는 날들이 즐거웠다. 같은 수업을 듣지는 않았지만 함께 밥을 먹거나 유명한 가게를 돌아다니는 친구도 있었다. 첫사랑도 학원에 있었던 때이니(감정이 생기기 전이었지만) 정말이지 좋은 시절이었구나 싶다. 그렇지만 먼 주변까지 둘러볼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안정적이었던 건 아니었나 보다. 지금의 내가 그런 것처럼.
7월부터 바쁘고 공허한 날들을 보냈다. 해야 할 것들이 많았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없었다. 약 일 년 동안 지속했던 어학원 생활을 청산하고 다음 입학 준비를 시작하며 비자도 새로 신청했다. 가을부터 다닐 학교가 원래 살던 집에서 터무니없이 멀었으므로 집을 알아보고 짐을 싸고 정리했다. 해야 할 것들이 많아 머릿속이 복잡했던 동시에 여러 가지 이유들로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하루의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수업 시간이 사라져 더 많은 시간을 외로움과 싸워야 했고 (그렇다고 이 시국에 바깥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도 없었으니) 익숙해진 환경과 정든 친구들과의 이별도 준비해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으므로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덮쳐오는 감정들을 무력하게 두기만 했다. 8월이 끝나갈 때 즈음에야 일들이 하나씩 정리되면서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모든 이별들을 무사히 마무리하고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고 있는 지금, 다시 바깥 생활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다. 어쩌면 전보다 더 심하게 고립된 상태일 수도 있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작은 방에 갇힌 지금 내 상태는 굉장히 안정적이다. 비슷한 시간에 하루를 시작하고 비슷한 시간에 하루를 마감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고 한 달 동안 덮여 있던 일기장도 펼쳤다. 다큐도 보고 영화도 보고 음악도 전보다 자주 듣는다. 보고 듣는 것이 느니 공부하고 싶은 것도 늘었다. 전보다는 마음에 여유가 생겨 사나흘에 한 번씩 외출도 한다. 고작 이 주 남짓 살았을 뿐인 동네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하다. 지금 내 일상은 아주 고요하고, 안정적이고, 평화롭다.
하지만 이건 거짓 평화라는 걸, 나는 결국 안정을 가장하고 있을 뿐이란 걸 이제는 잘 안다.
한국에서 우울증과 무기력증을 심하게 앓던 시절, 나는 어디에서든지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은 마음과 늘 싸웠다. 전공 수업 과제로 제출했던 유서에 나는 죽는다면 흔적 없이 죽고 싶으므로 유서를 남기고 싶지 않다고 썼던 적도 있다. 나는 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물론 용기가 없어 어떤 식으로든 시도한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며칠 전 한 SNS 피드를 보다가 '아, 지금이면 모두에게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질 수 있겠다'하는 생각을 불쑥했다. 나를 찾을 수 있는 모든 창구들과 핸드폰에 남은 타인의 모든 흔적들을 지우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무섭도록 평화로운 상태가 내 의지가 아닌 내 불안정에서 왔음을. 나는 언제든 다시 미끄러질 수 있는 것이다. 늪에서 간신히 빠져나왔을 뿐 아직 늪지대를 벗어난 게 아니기 때문에.
평화 뒤에 가려진 내 상태를 알았고 그 원인이 뭔지도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해결하고 싶다고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회가 다가오기 전까지 나는 아직 기다려야만 하고 언제 다시 뒤집힐지 모르는 이 일상을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니 바랄 뿐이다. 이대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질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오늘은 찾아오지 않기를. 그 마음을 영영 떠나보낼 순 없을 테니 아주 가끔씩만 찾아오기를. 안정을 가장하고 있을 뿐이더라도 오늘 하루도 무사히 마무리하기를. 이 고요하디 고요한 시간이 지나가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