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모델의 미래
얼마나 많은 삶이 담겨 있는 풍경인가. 지난 60년간의 역사를 돌아보면, 어딘가 마음이 뭉클해지고 앞날이 아득하게만 다가온다. 식민지와 전쟁의 폐허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갈아 만들어낸 신화. 건조하게 말하자면 빈곤에서 탈피하고 체제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발전국가 총력전의 결과이고, 예쁘게 말하면 여기저기서 모인 시민들이 함께 일구어 낸 태화강의 기적이다. 그 과정을 어떻게 이야기하건, 대한민국은 위대한 성과를 일궈냈다.
그리고 이제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모두가 ‘피크아웃 코리아’을 얘기하며, 동남권의 몰락과 지방소멸을 기정사실화한다. 단군 이래 가장 잘 사는 세대는 고점에서 ‘낮은 행복지수’, ‘낮은 합계출산율’ , ‘높은 부양비’라는 종합 청구서를 하나씩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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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출간된 양승훈 교수님의 <울산 디스토피아>는 산업도시 울산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얘기한다. 대기업은 글로벌 밸류체인 위에 올라탔지만, 중소 협력업체의 구조는 이전과 다르지 않다. 분절된 노동 이중시장은 여전하며, 노동계급 중산층의 재생산은 어려워졌다. 제조업에 비해 서비스 부문의 임금과 생산성은 낮으며, 여성을 위한 커리어 잡 확보는 쉽지 않다. 울산에서 다져진 중산층 가족의 자녀들은 하나둘씩 고향을 떠난다. 이러한 울산 문제는 한 도시만의 문제가 아니다. 울산이 무너진다가 아니라 제1산업도시인 울산조차 무너진다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저성장 - 노동 이중구조 - 인서울 중심 - 초저출산’ 등으로 얽혀있는 대한민국의 위기는 산업화 이래 제도적 경로의 문제다. 이제 어쩔 것인가.
스케일업-규모의 경제를 촉진하는 산업정책이 필요하다. 그간 대기업의 비용 절감이라는 목적에 맞춰져 온 중소협력업체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그래야 대체될 수 없는 ‘실행기능’을 유지하며 산업도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무엇보다 소득 양극화의 근간이 단순 비정규-정규직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부가가치-고부가가치 사업장 사이에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결국 중소협력업체가 ‘중소->중견->글로벌 소부장‘으로 거듭날 수 있는 유니콘 통로가 열려야, 하청 노동자의 실질 임금 인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대기업 공장이 더 이상 고용을 확대하지 않아도, 안정적인 블루칼라 일자리를 유지하거나 재생산할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다. (그렇게 하청 임금이 오르면 대기업이 오히려 직고용을 늘리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래야 ‘대기업이 빠져나가면 다 같이 망하는 구조’ , ’중국 기술추격 인한 소부장의 대체‘로부터 살 길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고진로 전략(high-road strategy)’은 일반산단 유치하여 새 공장 짓는다고 달성되지 않는다.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중장기적 시선으로 중소기업 간 M&A나 고숙련 엔지니어 육성, 기술 승계 등을 통해 ‘효율과 협력에 근간한 생산성 동맹‘을 재구성하는 과제다. 이를 위해선 자본과 노동조합 모두 현 위기에 책임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적대적 노사관계를 풀기 위해 노력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서로의 불만을 묻어두며 현상 유지를 목표로 하기보단, 신규 고용을 창출하며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쪽으로움직여야 한다. 더 늦기 전, 지금부터 하나하나 전환점을 만들어야 때다.
지역균형발전도 소지역주의를 깨고 동남권 전체 차원에서 산업 인프라와 교통권 이슈를 엮어 공동대응 해나가야 한다. 울산 정치권은 부산으로의 빨대효과를 우려해 메가시티 구상에 비판적이지만, 역설적으로 울산의 틀을 깨야 울산을 지킬 수 있다. 행정 지자체의 틀을 연담화 하여 동남권 권역의 청년•인구층을 넓게 쓰고, 수도권역에 대응할 수 있는 전략적 공간 분업을 구성해야 한다. 부산 양산에 사는 청년이 온산공단에 쉽게 통근할 수 있고, 창원 울산에 사는 20대 여성이 부산의 미디어 산업에 통근할 수 있는 구조가 돼야 한다. 그렇게 수도권에 대응하는 동남권을 구축하지 않으면, 모든 청년과 산업이 서울로 빨려 들어가는 관성을 막을 수 없다. 우리는 지난 동남권 지자체들이 제대로 된 합의와 토론도 없이 광역철도나 신공항 문제를 산으로 보내는 시간 동안 수도권은 천안 아산까지 도시철도 교통망을 확장하며 지방 젊은이들을 흡수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방 도시들끼리 다툴 때가 아니다. 이미 늦었지만 늦어질수록, 예타논리는 부수기 어려워지고, 수도권 블랙홀의 중력은 강해진다. 그러니 오늘이 가장 빠른 때이다.
이렇게 ‘울산을 살려야 한다 ‘고 주장하는 이유는, 필자가 울산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한민국 전체의 이익에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통계적으로 저출산을 설명하는 가장 강한 변수는 ’ 인구/경쟁밀도‘이다. 이러한 인서울 현상은 단순한 인구 이동을 넘어서, 한국 사회 전반이 내몰려있는 ‘높은 경쟁압력과 병목현상’의 한 축으로서 볼 필요가 있다. 2022년 OECD 보고서는 고밀도 경쟁압에 몰려있는 한국 사회를 ‘황금 티켓 증후군’이라 진단했다. 모두가 서울에 입성하려 하며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 뛰어든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내부적인 경쟁밀도는 글로벌 밸류체인 내에서의 부가가치 창출에 이어지지 못하고, 부가 쏠려 있는 공간 또는 직업으로의 진입에만 집중되고 있다.(김현성, <자살하는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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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모델은 ‘수도권 부동산 투기하지 않아도, 시험/고시를 통과하지 않아도, 성실히 일하면 중산층으로 거듭날 수 있는 삶의 경로‘를 상징해 왔다. 산업이 망해도 지역이 망해도, 더 다양한 경로와 성장이 가능하다면 ‘망해도 괜찮다’. 그러나 울산이 무너지면 (수출 제조업, 동남권이 무너지면), 그 빈자리를 더 나은 대안이 채울 것인가? 좁은 내수시장에 저부가가치 서비스업으로는 지방의 빈 공간을 메울 수 없다. 새로운 산업은 대신 - 오늘날 유럽 극우 돌풍이 그러하듯 - 새로운 포퓰리즘이 지방의 빈 공간을 차지하게 될지 모른다.
영원한 것은 없다. 장기적으로 우리 모두는 죽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역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나는 나의 고향이 디트로이트가 되지 않길 바란다. 다음 세대의 대한민국은 보다 다양하고 큰 꿈을 꾸길 희망 한다. 우리와 다음 세대가 살아갈 나라가, 수도권 상위중산층만 황금 티켓과 재생산을 향유하며 사람들 갈아 넣어 유지되는 그런 체제, 각자도생 또는 포퓰리즘의 공화국이 되지 않길 바란다. 부모가 멀쩡한 사람 앞에 두고 제 자식 더러 “열심히 안 하면 저렇게 된다”라고 모멸하지 않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수십 년간 치열하게 달려온 대한민국의 경로를 돌아봐야 할 때다.
해 질 녘 아산로를 넘어가는 124번 버스에서 문득 암울한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로 가득한 선착장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아래로 태화강물은 조용히 흘러 흘러 동해로, 태평양으로, 세계로 뻗어간다. 이 경관이 ‘근대 문화유산’이 아닌, ‘살아 숨쉬는 산업기반‘으로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길 바란다.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들이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