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공연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그중에서도 발레를 볼 때면 무대의 다른 몸과 움직임에 경이로움을 느끼곤 합니다. 그런 몸을 가지기까지, 그렇게 움직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는지 알기에 발레 공연이 끝나면 더 오랫동안 박수를 치게 됩니다.
영국 로열 발레단은 전통과 혁신을 융합해 수준 높은 공연을 선보이는 발레단입니다. 런던 코벤트 가든을 본거지로 19세기 고전 작품부터 다양한 현대 발레 작품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선보이고 있어요. 전통 있는 세계적인 발레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한국 발레무용수 전준혁 님을 소개합니다. 준혁 님은 지난 7월, 영국 로열발레단에서 퍼스트 솔리스트로 승급해 국내 매체에도 보도된 바 있습니다. 이런 유명한 분을 인터뷰해도 되는 건지 망설여졌지만 한편으론 그렇기에 더,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같은 도시에 살면서, 같은 언어를 쓰고 있다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발레라는 장르는 특히 그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짧기 때문에, 발레 하시는 분들을 만나면 나이보다 앞서 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준혁 님은 어떤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는 분이어서 경외감이 들었습니다.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준혁 님의 다음 공연은 놓치지 않고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발레무용수 전준혁입니다.
로열발레단에서 8년째 활동하며 공연을 올리고 있습니다. 3살부터 발레를 시작하여 고모 세 분께 발레를 처음으로 사사했고 9살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산하 영재학교에 들어가 발레를 배웠습니다. 13살에 영재원으로 이름이 바뀐 걸로 압니다. 선화예술학교에 입학해 발레 전공으로 졸업 후 스위스에서 열리는 국제 발레 콩쿠르 프리 드 로잔에 도전해 파이널리스트에 올랐으며 입단과 입학제의를 9곳에서 받았는데 가장 좋은 선택지가 로열발레학교라 생각돼 로열발레학교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로열발레스쿨 어퍼스쿨 과정(한국인 최초 입학)을 나디아 네리아 스칼라쉽 전액 장학금(한국인 최초 학비, 기숙사비, 생활비 전액 지원)을 받고 마쳤으며 2학년 때 이례적으로 학교에서 최고의 발레 학생에게 주는 상인 게일린 스톡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보통은 3학년에게 수상 합니다.
군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에서 열리는 유스 아메리카 그랑 프리 콩쿠르에 참가하여 콩쿠르 최고 상인 그랑프리를 수상하였으며 콩쿠르를 진행하던 고등학교 2학년 과정 때 아메리카 발레 시어터에서 입단제의를 받았으나 학교를 마치고 로열발레단에 입단하고 싶어 거절하였습니다.
영국 로열발레단에는 17/18 시즌에 오드 잽슨 영 댄서(Aud Jebsen Young Dancers Programme, 수습단원)로 입사 후 18-19 시즌에 아티스트로 승급, 22년에 퍼스트 아티스트로 승급, 23년에 솔리스트로 승급,
24년에 퍼스트 솔리스트로 승급하였습니다.
로열발레단 무용수들은 아티스트 Artist - 퍼스트 아티스트 First Artist - 솔리스트 Soloist - 퍼스트 솔리스트 First Soloist - 수석캐릭터 아티스트 Principal Character Artist - 수석무용수 Principals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 자신의 강점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생각하는 저의 강점은 습득력과 안목입니다. 누구에게나 배울 점을 찾고 좋은 점을 적용시키다 보니 지금처럼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못한 것을 본능적으로 구분해서 춤과 삶에 녹여내는 것 같습니다. 지난 6월 랩소디에서 주역을 맡았는데 키가 큰 편임에도 움직임이 빠르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랩소디(Rhapsody)는 1980년에 만들어진 프레드릭 애쉬튼(Frederick Ashton)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애쉬튼에게 의뢰한 러시아의 저명한 무용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자신의 개성을 작품의 핵심으로 삼아 만들었습니다. 남성 주인공 역할은 매우 유려한 도약과 회전, 가벼운 움직임이 특징입니다.
발레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잘 알려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에 맞춰 폭풍우가 몰아치는 구절에서 차분한 막간으로 이어집니다. 랩소디의 초연은 애쉬튼의 절친한 친구인 엘리자베스 여왕 폐하의 80세 생일을 기념하여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렸습니다. - 로열발레단 홈페이지 발췌
✓ 런던에 온 지 얼마나 됐나요? 어쩌다, 무엇 때문에 영국에 오게 됐나요? 왜 하필 영국 런던이었을까요?
런던에 온 지는 11년째입니다. 중학생 때까지 관심 있는 게 발레 말고는 없어서 영국이라는 나라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섬나라 인지도 몰랐습니다.
뉴스나 교과서에 나와도 발레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니니까 보고 넘어갔었는데 로잔에 콩쿠르를 다녀오고 영화 '빌리 엘리엇'에 나오는 학교가 로열발레학교라는 걸 알았습니다. 세계 최고의 발레학교라고 해서 입학하면 발레를 더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그때 영국이라는 나라가 있구나, 런던에 세계최고의 발레학교가 있구나. 내가 가 봐야겠다 해서 오게 됐습니다.
✓ 영국에 와서 달라진 점이 있나요?
영국에 와서 달라진 점이라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럴 수도 있지, 혹은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거랄까요. 런던에 처음 도착하고 지하철을 타는데 스크린 도어가 없어서 너무 신기했습니다. 철로 사이론 조그만 쥐도 돌아다니더군요. 지하철도 작고 동그랗고.
길거리나 공원에선 흔히 소변을 본 자국이나 보는 사람을 찾을 수 있고 소호 주변 상점 유리창은 안 깨져 있으면 이상할 정도죠. 옷차림과 인종,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그 둘로 설명이 불가한 사람 등 말 그대로 한국에 살 때는 상상도 못 하던 이념과 상황이 난무했습니다. 그런 나라에서 오래 살다 보니 웬만한 일에는 면역이 생겨서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한국에 돌아가면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는 제 모습에 스스로 많이 변했구나 합니다.
✓ 영국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을 때는 언제였나요?
공연을 할 때, 마치고 나서, 수준 높은 관객분들의 존중, 응원을 가슴으로 느끼게 될 때 예술인으로서 이런 무대에서 공연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일상의 사이사이에 유럽문화권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노력을 해서 숭고한 일을 하는, 특별한 사람을 대하듯 태도가 변하는 것도 퍽 재미있는 경험입니다. 예술가에 대해 굉장한 존중과 존경을 가지고 있음을 보고 느끼게 되니 항상 그럴 때마다 고마움을 느끼고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 분명 힘든 날도 있었을 텐데, 영국에 와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였어요?
세상 살아가는데 항상 힘듦과 어려움이 이어져 있는 거 같습니다. 힘든 날이 없는 날을 찾기가 힘든 거 같다 느끼는데 제가 그리 느끼는 가장 큰 이유 둘을 꼽으라면 발레단의 스케줄과 공연 일정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 날씨라고 말하겠습니다.
발레단 스케줄은 오전 10시 30분부터 저녁 6시 30분까지 주 6일 근무합니다. 공연이 있는 날은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리허설을 한 뒤 저녁 7시 30분에 공연을 시작해 밤 10시 30분에 끝나고, 무대 리허설까지 하는 날은 오전 9시 30분에 시작해 밤 10시 30분에 끝납니다. 그렇지만 발레의 특성상 시작하기 전 웜 업(준비) 과정이 적어도 15분 이상 필요합니다. 이 준비 시간은 무용수마다 다른데 1시간 이상 준비를 하는 무용수도 많습니다. 공연 후에도 분장 지우고 샤워하고 옷 갈아입는 등 시간이 걸리니 공연이 있는 날은 밤 11시쯤 퇴근하게 됩니다.
공연 횟수는 연간 약 150회 내외이니 일주일에 적으면 3번, 많게는 12번 공연을 하게 됩니다. 일 년 중에 일주일에 이틀을 쉬는 주가 채 열 번이 안되니 숨 돌릴 틈이 없습니다.
날씨는… 해가 자주 뜨지 않고 겨울이 길어 정신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따뜻한 날을 좋아하거든요. 기온으로 24도 이상을 선호하고 맑은 날에 햇볕에 부딪히는 자연과 건물, 사람들과 사물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기에 해 없는 나라 영국이 참 살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 영국에 오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미리 와본 사람으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영국이라는 나라에 너무 큰 환상을 가지고 온 다면 실망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럼에도 참으로 매력적인 나라임에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영국은 유럽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적으며 쾌활한 인종들이 뒤섞여 부대끼며 산다고 얘기하겠습니다.
발레에 대한 조언은 별로 없는데 육체예술이다 보니 선택을 할 수 있는 기간이 길게 이어지지 않습니다. 나이에 영향을 많이 받지요.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발전해야 합니다. 올바른 선택을 해서 올바른 연습을 해야 합니다.
기회가 오면 놓치면 안 됩니다. 기회의 문이 열려 있을 때 열고, 들어가고 비집고 기어서 들어가야 합니다. 문이 닫히면 죽을 때까지 다시는 열리지 않거든요. 천천히 닫히는 거 같은데 아차 하는 사이에 방심한 사이에 작은 틈만 남겨 놓고 있습니다. 틈이라도 열려 있을 때 도전해야 합니다. 다시 얘기하지만, 문은 한번 닫히면 다시는 열리지 않습니다.
✓ 당신의 인생 공연은 무엇인가요?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봤던 오페라 리골레토(Rigoletto) 질다(Gilda)의 1막 아리아가 가장 좋았습니다. 7-8분이 이어지는 노래인데 들으며 감동에 벅차올라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저 또한 그러한 감동을 주는 무용수가 되고 싶다 소망한 공연이었습니다.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하는 공연은 실패는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별로인 공연이라 한들 돈 값은 해줍니다. 비싸다고 생각할 수 있을 텐데, 공연 예술은 원래 비싸고, 비싼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번씩 앞서 언급한 만큼 감동을 받는데 그 정도 비용이면 싸다고 생각합니다.
오페라 '리골레토(Rigoletto)'는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의 작품으로 권력과 복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 드라마틱한 이야기예요. 이야기의 중심에는 리골레토라는 어릿광대가 있고 그의 딸 질다(Gilda)와 함께 복수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됩니다. 리골레토는 딸을 지키려고 하지만, 상황이 꼬여 예상치 못한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지게 됩니다.
질다는 리골레토의 사랑하는 딸로, 순수하고 순진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에요. 그녀는 만토바 공작에게 사랑에 빠지고, 그로 인해 아버지와 자신 모두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질다는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큰 희생을 감수하는데,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이 작품의 감동적인 요소 중 하나입니다.
오페라 리골레토 1막에서 질다의 아리아 "Caro nome(사랑스러운 이름)"은 그녀가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설레는 감정을 담은 노래입니다. 질다는 공작의 진짜 신분을 모른 채, 순수하고 열정적인 마음으로 그를 생각하며 "사랑스러운 이름이여,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이름이여"라고 노래합니다.
✓ 요즘 가장 몰입하고 있는 일은 무엇이고, 이루고자 하는 꿈은 무엇인가요?
어떻게 하면 더 나 다움으로 관객에게 감동을 줄 것인가.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는가. 항상 그 점을 염두에 두고 공연하고 연습하고 있습니다. 배역을 맡으면 그 인물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 보면서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합니다.
지금 발레단에서 수석무용수로 활동하는 게 꿈입니다. 안되면 어쩔 수 없고요. 근데 될 거 같습니다. 준비는 딱히 안 하고 그냥 매일매일 똑같이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말솜씨 부족하고 진지해져 재미없어져 버리는 무용수의 사담을 들어주시어 감사합니다.
제가 말솜씨보다는
춤 솜씨가 좋습니다.
보러 오시면
감동받으실 수 있게
오늘도 땀 흘리며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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