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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극장이 만드는 거대한 물결

알메이다 극장 Almeida Theatre

by 정재은

알메이다 극장은 런던 북부에 이슬링턴 스퀘어라는 쇼핑 아케이드와 주택가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325석 규모의 친밀감 있는 이 극장은 오늘날 세계 연극계가 주목하는 창작의 현장이자, 실험과 모험을 멈추지 않는 공간이다.

알메이다 극장 전경 (출처: 극장 홈페이지)


1837년, 이슬링턴 문화 과학 협회를 위해 지어진 알메이다 극장 건물은 원래 도서관과 강연장, 실험실, 박물관의 기능을 함께 갖춘 지식의 공간이었다. 협회가 1872년 해산한 후에는 한동안 구세군 예배당으로 쓰이다가, 1970년대 후반, 레바논 출신 연출가 피에르 오디가 건물을 인수하며 본격적인 극장화 작업이 시작됐다. 1979년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창단한 알메이다 극단은 이듬해인 1980년, 이곳을 공식 공연장으로 개관했고, 오디는 예술감독으로서 음악과 연극 페스티벌을 개최하며 극장의 실험성과 국제적 감각을 다져나갔다. 그 후로도 알메이다는 영국은 물론 세계 각국의 실험적이고 새로운 무대를 적극적으로 유치하며 오늘날까지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켜왔다.


극장의 흰색 외관은 여전히 연구소나 회관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도서관의 명맥을 시각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한편, 내부 무대는 벽돌을 그대로 드러낸 투박한 벽면으로 둘러싸여 밀도감을 더한다. 원형에 가까운 무대를 감싸고 있는 좌석 구조가 독특한데, 입장하는 문이 좌석 위치에 따라 다르다. 별도로 위치해 있는 로비 공간을 따라서 입장할 수 있다. 2층 객석으로 가기 위해서는 건물 밖으로 나가 골목으로 나 있는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객석이 나온다. 이런 비일상적인 동선마저도 알메이다 극장의 경험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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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극장, 다른 무대. '아더랜드 Otherland'와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Cat on a Hot Tin Roof' (출처: 극장 홈페이지)




알메이다에서 시작된 작품들

내가 처음 알메이다 극장을 찾은 건 2024년 여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2024년 6월 6일~7월 29일) 공연이 한창일 때였다. 촛불 속에 얼굴을 맞댄 로미오와 줄리엣이 포스터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 이미지에 이끌려 망설임 없이 예매 버튼을 눌렀다.


이 작품의 연출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주목받은 레베카 프렉널의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많은 기대를 모았다. 공연은 알메이다 특유의 벽돌 벽면을 적극 활용해, 배우들이 수백 개의 초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무대 벽에 하나씩 걸어두며 비극적인 마지막을 준비하는 모습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마지막 장면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촛불들은 공연의 여운을 길게 붙잡아두었다.

7.jpg 로미오와 줄리엣 (출처: 극장 홈페이지)


최근 해럴드 핀터 극장에서 본 '세월(The Years)'은 무대와 삶이 만나는 감각적인 접점에 자리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동명 에세이를 각색한 것으로 알메이다가 2024년 여름 무대에 올린 뒤 호평을 받으며 2025년 1월 웨스트엔드의 해럴드 핀터 극장으로 진출했다.


'세월'은 작가가 에세이에 표현한 것처럼, 어쩌면 그보다 더,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거부한다. 1940년생인 에르노가 프랑스 사회와 가족, 여성, 섹슈얼리티, 계급, 정치, 언어에 대해 자신과 함께 나이 들어간 세대의 기억을 빌려 풀어낸 이 작품은, 소설이자 자서전이며 시대의 집단적 연대기를 닮았다. 2022년 네덜란드 헤이그 국립극장에서 초연된 이 작품을 영어 무대로 옮긴 이는 1986년생 노르웨이 연출가 엘린 아보. 그는 현재 암스테르담 국제극장의 예술감독으로, 날카로운 시선과 부드러운 연출을 동시에 보여주는 연출가다.


무대 위에는 다섯 명의 배우가 있다. 그들은 9세부터 노년기까지 각기 다른 시기의 ‘아니’를 연기하며, 작가이자 학생, 딸이자 어머니, 연인이자 운동가로서의 여성의 삶을 끊김 없이 이어간다. 모든 배우가 퇴장 없이 무대를 함께 지키며 서로의 장면을 응시하고, 때로는 눈물짓는다. 배우들이 서로를 다정히 안아주며 마무리하는 피날레는, 이 작품이 지닌 연대의 온기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작품은 성적 욕망과 낙태 경험 등 민감한 소재를 가감 없이 다루며, 관객의 사적 기억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사회적 맥락 위에 놓인다. 공연에는 트리거 워닝이 상세히 사전 공지되었고, 다양한 연령대 관객이 정적 속에서 진지하게 몰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세월'은 2024년 가디언이 선정한 '올해의 공연'에 꼽혔고 올리비에 어워즈에서도 연극 신작을 비롯한 5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았다. 시대를 건너는 한 여성의 목소리가 다섯 개의 얼굴을 통해 관객의 마음에 오래 머문다.


The Years.jpg '세월' 웨스트엔드 공연 포스터


한국에서도 현재 인기리에 공연 중인 연극 '미러(A Mirror)'는 2023년 여름, 알메이다 극장에서 처음 막을 올렸다. 샘 홀크로프트가 쓰고 연출가 제레미 헤린이 연출한 이 작품은, 개막 직후 전 회차 매진을 기록하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이 연극은 거짓말이다(This play is a lie)"라는 문장을 정면에 내세우며 관객을 결혼식장으로 위장한 무대에 초대한다. 그러나 곧 드러나는 건 그것이 허가받지 않은 연극이라는 사실이다.


'미러'는 표현의 자유와 검열,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교란하며 오늘날의 정치적 현실과 예술의 존재 방식을 날카롭게 비추는 다층적인 드라마다. 배우와 관객, 허구와 현실 사이의 긴장감을 탁월하게 활용하며 극장의 힘을 다시금 환기시킨 이 작품은 2024년 1월 웨스트엔드의 트라팔가 극장으로 자리를 옮겨 더 많은 관객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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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메이다 극장 초연 사진 (출처: 알메이다 극장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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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팔가 극장 재연 사진 (출처: 알메이다 극장 홈페이지 photo by Marc Brenner)




극장과 함께 나이를 먹은 예술감독 루퍼트 굴드

알메이다 극장이 최근 10여 년간 올리비에 상을 비롯해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는 공연들을 꾸준히 선보일 수 있었던 데에는, 예술감독 루퍼트 굴드(Rupert Goold)의 ‘오랜 헌신’이 큰 역할을 했다.

2013년부터 예술감독직을 맡은 그는 “연극은 질문하는 예술”이라는 철학 아래, 동시대 문제의식을 품은 신작부터 고전의 파격적인 재해석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시도해 왔다. 다소 보수적으로 여겨졌던 극장의 분위기는 그의 리더십과 함께, 보다 진보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으로 바뀌었다. '킹 찰스 3세'를 비롯해 '아메리칸 사이코', '서머 앤 스모크', '패트리어츠', '타미 페이' 등 수많은 히트작들이 알메이다에서 출발해 웨스트엔드와 뉴욕 브로드웨이로 진출했으며, 이는 ‘작은 극장에서 시작된 세계 투어’라는 별명을 낳기도 했다.


루퍼트 굴드는 알메이다에 오기 전, 2005년부터 8년간 실험적 순회극단 헤드롱(Headlong)의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며 루시 프레블의 '디 이펙트'(이 역시 한국에서 공연 중), '엔론' 등을 통해 연극계에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드러냈다. 그는 '맥베스(2008)', '엔론(2010)'으로 두 차례 올리비에 연출상을 수상했고, 2017년에는 CBE(대영제국 훈장 사령관급)를 받으며 영국 공연예술계에서 한 단계 높은 위상을 인정받았다.


2026년부터는 런던의 대표적인 극장 중 하나인 올드 빅(Old Vic)의 예술감독으로 자리를 옮길 예정이며, 마지막 시즌에는 4편의 세계 초연작과 4편의 고전 재해석을 포함한 총 10편의 작품을 선보일 계획이다.


그의 인터뷰와 사진을 찾아보니, 한때 패기 넘치던 청년 연출가는 어느덧 인자한 미소를 짓는 중년이 되어 있다. 한 극장에서 예술감독으로 12년을 보내는 일은 어떤 경험일까. 일터이자 집, 매일 마주한 배우와 관객, 그리고 무대가 함께 나이 들어가는 가족 같은 감정이었을 것이다.




알메이다가 연극을 믿는 방식

알메이다 극장은 “영국의 차세대 예술가들이 세계 무대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설립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연극과 공연,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큰 질문’을 던지는 용감한 작품을 선보이며, 연극이 단순한 오락을 넘어 시대를 비추는 매체임을 강조해 왔다.


현재를 탐구하고, 과거를 되짚으며, 미래를 상상하는 것


알메이다가 추구하는 예술은 명확하다. 신작이든 고전이든, 극장이든 거리든 온라인이든, 가장 흥미로운 아티스트들과 함께 위험을 감수하며 관객에게 자극과 영감을 주는 살아 있는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점점 더 분열되고 있는 사회 속에서, 알메이다는 극장이야말로 공동체를 이어주는 필수적인 힘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철학은 지역 사회와의 지속적인 협업으로도 확장된다. 이슬링턴 지역의 젊은이들을 위한 ‘영 아티스트(Young Artists)’ 프로그램, 학교 교육 연계 활동, 25세 이하를 위한 무료 티켓 정책 등은 연극을 배움과 성장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 준다. 전문 예술가와 지역 창작자, 주민 공연자들이 함께하는 커뮤니티 프로젝트도 활발하다. 이 공동체 기반의 친밀한 운영은 앞서 소개한 오렌지 트리 극장과 닮았지만, 알메이다는 보다 실험적인 예술과 국제적 지향성을 뚜렷하게 유지한다.


2024년 가을에는 ‘앵그리 앤 영(Angry and Young)’이라는 시즌 타이틀 아래 아널드 웨스커의 뿌리(Roots), 존 오스번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Look Back in Anger) 같은 20세기 영국 연극사의 기념비적 작품들을 재조명했다. 현재 진행 중인 2024–2025 시즌 역시 젠더, 권력, 기억, 정의 같은 주제를 탐색하며, 신진 작가와 배우들에게 꾸준히 기회를 열고 있다.


앞으로 이 작은 극장이 만들어낼 파장과, 새 예술감독이 보여줄 방향성에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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