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트리 극장 Orange Tree Theatre
런던 남서부 리치먼드. 템스강이 굽이치는 이 지역은 은퇴한 부유층과 오래된 저택, 왕립공원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리치먼드 파크와 전 세계 식물들이 모인 큐가든(Kew Garden)으로 유명하다. 이런 동네 중심가 한복판, 아담한 건물 하나가 눈에 띄는 주황색으로 OT라는 이니셜을 써두었다.
‘오렌지 트리 극장(Orange Tree Theatre)’은 펍에서 시작됐다. 1971년, 배우이자 연출가였던 샘 월터스(Sam Walters)는 리치먼드의 한 펍 2층을 빌려 소극장 활동을 시작했다. 이 펍은 지금도 오렌지 트리 극장 앞에 남아 있다. 초기 공연은 매우 소박했다. 무대는 없었고, 조명도 자연광에 의존했다. 여섯 개의 교회용 벤치가 둥글게 놓였고, 그 안에 80명 정도가 앉았다. 배우들은 관객으로 둘러싸여 연기했다. 이 친밀한 구조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시어터 인 더 라운드(Theatre in the Round, 모든 좌석이 무대를 완전히 에워싸는 형태)’의 출발점이 됐다. 지난 회에 다뤘던 '앳소호플레이스'(600여 석)도 비슷한 형태이긴 하지만 오렌지 트리 극장은 180석으로 규모가 훨씬 작다.
오렌지 트리 극장은 런던에서 보기 드문 ‘인 더 라운드(in-the-round)’ 형식의 공연장이다. 객석이 사방에 둘러져 있어 배우는 어느 방향으로도 관객을 마주해야 한다. 다른 관객들의 반응이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들의 표정마저 공연의 일부가 된다. 배우는 진심으로 말하지 않으면 금세 들키고, 관객은 집중하지 않으면 놓쳐버린다. 숨을 곳이 없다. 이 긴장감이 바로 이 극장의 진짜 매력이다.
오렌지 트리 극장에는 점심시간에 열리는 공연도 있다. 런치타임 공연은 직장인이나 노년층 관객들이 부담 없이 연극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든 프로그램으로, 1시간 남짓한 짧은 공연이지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런치타임 공연은 공간과 환경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공연 형식이었다. 펍에는 조명과 무대 장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배우는 온전히 말과 몸으로 이야기를 전달해야 했고, 관객은 숨결 하나 놓치지 않으려 집중했다. 여기에서 출발함 극장은 더 이상 관람의 공간이 아니라, 배우와 관객이 함께 숨 쉬는 생생한 체험의 장소가 되었다.
당시에는 관객이 많아 계단에 줄을 서기도 했고, 배우들이 같은 작품을 연이어 두 번 공연하는 일도 많았다. 지역 주민들은 마치 동네 모퉁이 카페를 찾듯 극장을 드나들었고, 그 속에서 연극은 특별한 것이 아닌 삶의 일부로 자리 잡아갔다. 그 시절 펍 위 작은 방의 열정과 친밀감은 오렌지 트리 시어터의 정체성이 됐다. 1991년, 극장은 현재의 자리로 옮겨 독립된 공연장을 갖추었는데, 관객과 배우 사이에 벽이 없는, 숨 막히도록 가까운 초창기의 분위기와 긴장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도 '아일랜드' '돼지우리' 등으로 알려진 작가 아돌 후가드(Athol Fugard)가 쓴 단편 '코트'가 런치타임 연극 무대에 올랐다. 196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어머니와 남편의 낡은 코트를 통해 억압과 기억을 이야기한다. 배우들은 대본이나 희곡집을 손에 들고, 편안한 복장으로 연기했다. 빈 무대에 의자 몇 개와 한 벌의 코트가 전부였다. 그 코트는 한 남성이 정치적 이유로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면서 남기고 간 것이다. 이후 무대 위에서는 그의 아내와 친구들이 등장해 그가 남긴 외투의 의미를 해석한다. 이 코트는 희생, 연대, 사랑, 배신, 공동체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인물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그 의미를 되새긴다. 이 극은 하나의 물건을 통해 그 부재 속에서 남겨진 사람들, 특히 여성과 공동체가 겪는 갈등과 성장을 조명한다.
196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체제가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을 법적으로 차별하고 분리했던 20세기 최악의 인종차별 정책이다. 정치적 반대자들이 자주 체포되고, 흑인 공동체는 철저히 분리되고 억압받았다. 아돌 후가드와 공동 창작자들은 이러한 현실을 연극을 통해 고발하고자 했다. 검열을 피해 워크숍 형식으로 공연하거나 비공식적 장소에서 상연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자그마한 오렌지 트리 시어터 2층 객석에서 무대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 시대의 어느 공연장의 모습도 이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렌지 트리 극장은 과거에도 아돌 후가드의 작품들을 소개해왔다. 덕분에 이 극장에서는 대형 극장에서는 보기 어려운 희귀하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잘 쓰였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희곡을 발굴해 무대에 올리는 것이 오렌지 트리의 철학이며, 관객에게 연극의 새로운 얼굴을 꾸준히 소개해온 저력이기도 하다.
이 극장의 중심에는 늘 사람이 있다. 작가의 언어, 배우의 목소리, 그리고 관객의 상상력이 다른 세계와 삶으로 우리를 데려간다고 믿는다. 연극을 매개로 인간다움을 기리고, 지역 사회와 세대를 연결하는 것이 이들의 사명이다. 그 신념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지역 합창단과 커뮤니티 이벤트, 다양한 연령대를 위한 참여형 프로젝트로 이어진다. 점심시간 공연, 셰익스피어 교육 프로젝트, 저녁 토론회와 동네 진토닉까지. 이 극장의 일상은 그 자체로 무대다.
일반적인 공연의 경우, 장년층 관객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오렌지 트리 극장은 아이들과 청소년을 위한 다양한 셰익스피어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생생한 무대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2025년에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인터랙티브 공연 '줄리어스 시저'를 공연한다. 2시간 워크숍과 1시간 공연으로 구성된 이 프로그램은 어린이들이 셰익스피어 이야기에 친숙해지고 무대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다. 2024년 참여 교사들은 이 프로그램이 학생들의 창의력과 팀워크, 언어 능력 향상에 크게 기여한다고 평가했다.
중고등 학생들을 위한 '셰익스피어 업 클로즈 시리즈'도 있다. 길드포드 셰익스피어 컴퍼니와 공동 제작한 이 80분 분량의 작품은 '맥베스'와 '로미오와 줄리엣'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해, 학생들이 원작의 핵심 줄거리와 주제를 쉽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했다. 2024년 11월 학교 순회공연 후, 12월에는 오렌지 트리 극장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공연 후 진행되는 Q&A와 배우 워크숍을 통해 학생들은 언어, 등장인물, 주제를 깊이 탐구할 수 있다. 오렌지 트리 극장은 이처럼 학교와 지역 사회, 극단과 협력하여 셰익스피어 작품과 연극의 매력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적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오렌지 트리 극장은 젊은 세대와의 연결을 위해 ‘OT Under 30’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는 18세부터 29세까지의 관객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으로, 30세 미만이라면 모든 공연을 단 15파운드(약 28,000원)에 관람할 수 있다. 특정 금요일 저녁에 열리는 ‘OT Under 30 Nights’에는 업계 전문가와의 패널 토론, 네트워크 행사 등 다양한 혜택이 무료 음료와 함께 제공된다. 공연을 관람하는 것을 넘어 연극계와의 접점을 마련하는 이 제도는, 단순한 할인 혜택을 넘어 연극의 세계에 깊이 스며드는 기회가 된다.
놀라운 점은, 이 모든 것이 지원금 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영국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지 않는 대신, 관객과 후원자의 지지로 매년 약 65만 파운드를 모금해 운영을 이어간다. 적은 자원으로도 고유한 빛을 잃지 않는 이 극장은, 마치 오래된 나무처럼 동네에 단단히 뿌리내린 채 뻗어나가고 있다.
오렌지 트리 극장은 더 넓고 포용적인 공간으로의 도약을 준비 중이다. 2026년 완공을 목표로 한 ‘모두를 위한 극장(A Theatre for Everyone)’ 프로젝트는 약 400만 파운드(한화 약 64억 원) 규모의 자본 개발 사업이다. OT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역사적 건물의 고유한 분위기와 상징적인 원형 무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접근성과 편의성, 지속가능성을 대폭 향상할 계획이다.
팬데믹은 모두에게 충격과 혼란을 안겨주었지만, 특히 관객과 직접 마주하고 함께 일해야 하는 공연 업계에는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로 큰 타격이었다. 그럼에도 다행히, 팬데믹 이후 오히려 공연은 이전보다 더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극장이 문을 닫고, 공연이 취소되었던 시기를 지나며, 생생한 라이브 무대를 그리워하던 관객들이 다시 극장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오렌지 트리 극장 역시 팬데믹을 지나며 한층 강화된 공동체적 역할과 관객의 다양성을 고려해 ‘계단 없는 입장’과 ‘공통 정문’, 새로운 엘리베이터와 휠체어 동선 등을 포함한 장애 없는 디자인이 적용된다. 또한, 기존에 지적되었던 부족한 화장실, 협소한 공간 등도 개선된다. 로비와 식음료 판매 공간인 프런트 오브 하우스뿐 아니라 백스테이지의 에너지 효율도 높이며, 지속가능한 극장의 기반을 다진다고 한다.
접근성 향상 (Transforming Access)
→ 계단이 없고, 새로운 엘리베이터와 휠체어 접근로가 마련되어 처음으로 모든 사람이 같은 정문을 통해 들어올 수 있다. (현재는 반드시 계단을 올라야만 극장에 접근이 가능하다.)
환영받는 공간 만들기 (Creating a Welcoming Space)
→ 추가 화장실, 관객, 지역 사회 참여자 및 이벤트를 위한 공간 확대 등 시설 개선한다
지역 사회에 투자하기 (Investing in our Local Community)
→ 리치먼드의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지역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지속가능성 내재화 (Embedding Sustainability)
→ 로비와 백스테이지 공간에서 탄소 발자국을 줄인다.
이 네 가지 방향은 리모델링을 넘어서, 극장의 역할과 철학을 새롭게 정립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토대가 될 것이다.
극장 운영진은 공사 기간 중에도 공연을 이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관객들은 임시 출입구를 통해 여전히 극장을 찾을 수 있다.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한 건물 개보수를 넘어, 리치먼드 지역사회와 함께 자라온 오렌지 트리 극장이 다음 세대를 위한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움직임이다. 창립자 서클(Founders Circle)을 통해 현재까지 목표 금액의 절반 이상을 모금했으며, 2025년 후반에는 본격적인 공공 모금 캠페인이 시작될 예정이다.
지역사회와 긴밀하게 관계를 맺으며, 학생들이 공연의 매력을 친숙하게 느낄 수 있도록 눈높이에 맞춘 작품을 선보이는 오렌지 트리 극장은, 미래를 준비하는 동시에 독립성을 지키며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확고히 드러내는 모두를 위한 극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