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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의 야외극장

오픈 에어 시어터 Regent Park Open Air Theatre

by 정재은

도심 속에서 쉼을 찾는 일은 런던에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넓은 잔디밭과 아름드리나무가 어우러진 공원들은 분주한 도시 생활 속에서도 여유와 평온을 선사한다. 특히 런던 중심부에 자리한 리젠트 파크는 다양한 매력을 품은 공간이다. 보트를 탈 수 있는 호수와 계절마다 색을 달리하는 장미 정원, 조용한 산책로, 그리고 런던 동물원까지. 이 공원은 단순한 녹지 공간을 넘어 도심 속 복합 문화 쉼터의 역할을 한다.


이 리젠트 파크 안에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야외극장 중 하나인 ‘오픈 에어 시어터’(Open Air Theatre)가 자리하고 있다. 관객은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나 저녁 하늘의 노을을 보며 공연을 관람하게 된다. 극장이라는 공간이 지닌 마법은 실내에 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야외라는 환경은 극장을 더욱 ‘살아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 관람의 경험은 자연과 무대, 관객이 하나 되는 순간으로 확장된다.


공연 예술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라도 오픈 에어 시어터를 한 번쯤 찾는다면, 극장이 주는 감각적이고도 잊을 수 없는 체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야외극장은 단지 공연을 올리는 장소가 아니라, 극장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생생한 답을 주는 공간이다.


이미지 출처: 오픈에어 시어터 홈페이지


리젠트 파크 오픈 에어 시어터는 이름 그대로, ‘진짜’ 야외에 있다. 천장도, 벽도 없이 오로지 하늘과 나무, 잔디에 둘러싸인 이 극장은 런던 중심부의 번화함 속에서도 자연과 예술이 공존하는 특별한 무대를 만들어낸다. 비가 오면 관객은 우비를 입고, 맑은 날에는 별빛 아래에서 공연을 본다. 이 극장에서의 기억은 무대 위 장면보다, 그날의 공기와 바람, 함께 웃고 박수치던 관객들의 얼굴로 더 오래 남는다.


자연 속에서의 공연은 단순히 실내를 벗어났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바람 소리, 새소리, 나뭇잎의 흔들림 같은 요소들이 공연의 일부가 되고, 관객은 무대를 ‘관람’하는 존재를 넘어, 하나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실내 극장에서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는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공연은 무대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극장을 둘러싼 모든 환경 속에 살아 숨 쉬게 된다.


야외 공연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예측 불가능성이다.


날씨, 빛, 소리 등 매 순간 달라지는 환경은 공연마다 새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저녁노을, 지나가는 구름, 때때로 무대를 가로지르는 새 한 마리조차도 이 극장만의 유일무이한 연출로 작용한다. 매번 다를 수밖에 없는 라이브 공연의 본질이 가장 생생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이곳의 매력은 무대 위에서만 펼쳐지지 않는다. 오픈 에어 시어터는 공연 전후의 시간까지 관객의 경험으로 끌어안는다. 관객은 극장 바에서 와인 한 잔을 즐기고, 잔디밭에 앉아 피크닉을 하거나, 공연의 여운을 안고 리젠트 파크 산책로를 걸으며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다. 단순히 ‘공연을 본다’는 차원을 넘어, 일상에서 벗어난 여유와 감각을 누리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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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촬영한 오픈 에어 시어터 모습


오픈 에어 시어터는 런던 극장 중에서 가장 긴 바(Bar)를 갖추고 있다. 객석을 둘러싼 넓은 식음료 공간은 관객들의 미각까지 만족시킨다. 해가 지기 전부터 곳곳에서는 작은 축제가 시작된다. 관객들은 삼삼오오 모여 음식을 나누고, 공연을 기다리며 담소를 나눈다. 이곳은 단지 무대를 바라보는 공간이 아니라, 예술을 매개로 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장소다. 서로는 처음 보는 사이지만,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은 순간을 함께 기다린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유대감이 생긴다. 그 분위기 자체가 이미 공연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오픈 에어 시어터는 공연을 보는 것을 넘어, 자연과 함께 예술을 ‘살아내는’ 경험을 제공한다. 공연의 감동은 극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연의 치유력, 예술의 감성, 공동의 경험이 겹겹이 쌓이며 일상과는 다른 감각을 남긴다. 그래서 이곳에서의 공연은 더욱 오래, 더욱 깊게 기억된다.


야외극장의 특별함은 결국 공연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 공연을 둘러싼 모든 환경과 순간들, 그리고 그 안에서 관객이 느끼는 감정의 밀도에 있다. 무대와 관객, 자연과 예술,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이 공간에서, 우리는 극장이 왜 특별한 장소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241_SH1.jfif 이미지 출처: 오픈에어 시어터 홈페이지


리젠트 파크 오픈 에어 시어터는 1932년, 예기치 못한 실패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런던의 한 극장에서 상연된 무솔리니의 연극이 참패하자, 급하게 대체작으로 셰익스피어의 십이야를 리젠트 파크의 야외무대로 옮겼다. 결과는 놀라웠다. 2,000명이 넘는 관객이 잔디밭에 모여 햇살 아래 연극을 관람했고, 단 하루의 임시 공연이 런던에서 가장 독창적인 극장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이 극장은 ‘공연은 사라져도 극장은 남는다’는 명제를 현실로 증명해 왔다.


단순한 공연 장소를 넘어, 리젠트 파크 오픈 에어 시어터는 상주 예술감독을 중심으로 창작과 제작 기능을 갖춘 ‘제작 극장(producing theatre)’이다. 설립 초기에는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중심으로 레퍼토리를 구축했으며, 오늘날에도 어린이와 가족 관객을 위한 셰익스피어 작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동시에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헬로, 돌리!', '숲속으로(Into The Woods)', '크레이지 포 유' 등 대형 뮤지컬을 자체 제작하여 웨스트엔드는 물론 브로드웨이까지 진출시키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2017년 상연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그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영국 전역은 물론 북미와 호주 투어로 이어졌으며, '헬로, 돌리!'와 '인투 더 우즈'는 올리비에상을 수상하며 비평과 흥행 모두를 거머쥐었다. ('숲속으로'는 2025년 12월 런던 브리지 시어터 공연을 앞두고 있다.) 이처럼 오픈 에어 시어터는 야외 공연장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영국 공연계의 중요한 제작 허브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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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형태로 변신하는 오픈 에어 시어터 무대. 왼쪽부터 'Evita' 'As You Like It' 'Shuked' (이미지 출처: 극장 홈페이지)


천장도, 벽도 없는 이 극장의 물리적 조건은 창작자에게 도전이기도 하다. 음향과 조명 장비를 천정 구조에 의존할 수 없기에, 기술적 대안을 창의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이 극장을 무대 예술 실험의 장으로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한계를 극복하며 탄생한 무대 위 장면들은 야외라는 환경과 맞물려 관객에게 더욱 생생한 감각을 전달한다.


이 무대를 거쳐 간 이름들 또한 화려하다. 비비안 리, 주디 덴치, 베네딕트 컴버배치 등 세계적인 배우들이 이 극장을 거쳐갔다. 하지만 오픈 에어 시어터가 진정으로 자랑하는 것은, 매년 14만 명이 넘는 관객이 이곳을 찾는다는 사실이다. 공연은 끝나고 무대는 철거되지만, 그날의 공기와 하늘, 관객들의 웃음과 박수는 오래도록 이 극장에 남는다.


예술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이 극장은 특별한 공간이다. 리젠트 파크의 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공연은, 극장이 단지 예술을 소비하는 공간이 아니라, 감정과 경험을 공유하는 장소임을 일깨운다. 공연은 사라지지만, 그 공연을 품었던 극장과, 그 안에서 함께한 사람들의 기억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오픈 에어 시어터는 바로 그런 ‘기억의 장소’로서, 오늘도 하늘 아래 무대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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