앳소호플레이스 @sohoplace
런던 웨스트엔드에 무려 50년 만에 생긴 새 극장, 앳소호플레이스(@sohoplace). 특수 기호로 시작하는 이름부터 감각적인 이곳은 웨스트엔드의 명성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린 완전히 새로운 공간이다.
공연 프로그램 뒷부분에 자랑스럽게 '단 12년 만에 극장을 짓는 법 HOW TO BUILD A THEATRE IN ONLY 12 YEARS'이라는 제목을 보고 큭 웃음이 났다. 영국에 머물면서 느낀 진행 속도가 체감되었기 때문이다.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는 2009년 착공, 2011년 개관했고, LG아트센터 서울은 착공 4년 6개월 만에 개관했다. 런던에서 집을 구할 때 집 옆에 공사장이 있어 시끄럽지는 않은지 문의를 했는데 3년이 다되어 가는 지금도 계속 공사가 진행 중이다.
50년 동안 새 극장이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영국 스럽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는 웨스트엔드라는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극장들은 도심 한복판에 밀집해 있어 새로운 부지를 확보하기가 극히 어렵고, 문화유산 보호구역으로서 까다로운 건축 규제와 높은 비용이 진입 장벽으로 작용해 왔다. 이로 인해 완전히 새로운 극장을 짓기보다는 기존 극장을 리노베이션 하거나 개조하는 방식이 선호되어 왔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주택 역시 이런 방식으로 리노베이션 하여 사용한다. 역사적 건축 보존 정책과 건축 문화 때문에 리노베이션 하여 사용한다. 대부분의 집은 60-80년 이상 됐고 100년을 훌쩍 넘은 집도 많다.)
웨스트엔드는 기존 극장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장기 흥행작 위주의 보수적인 운영이 이뤄져 왔고, 새로운 극장에 대한 투자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sohoplace는 웨스트엔드에 반세기 만에 새롭게 들어선 보기 드문 신축 극장으로, 단순한 공간을 넘어 도시 공연 문화의 흐름을 바꾸는 상징적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오래된 건물을 리노베이션 하는 일이 일반적인 이 지역에서, 이례적으로 '신축'된 이 극장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2010년, 영국 부동산 개발회사 더웬트 런던 주식회사(Derwent London PLC)의 창립자이자 CEO였던 존 번스(John Burns)는 공연계 인물 한 명에게 전화를 건다. “소호에 극장을 하나 짓는 데 관심 있으신가요?” 단순해 보이는 제안이었지만, 그는 단지 건물을 세울 부동산 파트너가 아닌, 직접 공연을 만들고 운영할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전화를 받은 이는 다름 아닌, 영국 공연계를 대표하는 공연 프로듀서 니카 번스(Nica Burns). 배우 출신인 그녀는 웨스트엔드에서 30년 이상 활약하며 수많은 흥행작을 제작해 왔다. 그녀는 현재 팰리스, 리릭, 아폴로, 개릭, 보드빌, 더치스 등 웨스트엔드의 핵심 극장 6곳을 운영하는 나이맥스 시어터(Nimax Theatres)의 공동 대표이다. 영국 정부로부터 CBE(대영제국 훈장)를 수훈한 문화예술계 리더로, 지난 회 연재에 소개했던 돈마 웨어하우스 Donmar Warehouse의 예술감독으로 활동(1983-1989) 하기도 했으며, 수많은 연극과 코미디 공연을 제작했다.
니카 번스는 이 전화를 ‘극장계의 오디션’처럼 느꼈다고 회상한다. 그녀는 2011년 공식적으로 더웬트의 극장 파트너가 됐고, 설계와 기획 단계에서부터 직접 참여해 공연 제작자들의 현실적 요구와 창작 욕망을 반영한 ‘이상적인 극장’을 만들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니카는 공연 제작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했다고 한다.
당신이 꿈꾸는 극장은 어떤 공간인가요?
웨스트엔드에서 할 수 없었던 작업이 있다면,
어떤 극장에서라면 가능할까요?
놀랍게도 많은 연출가, 무대 디자이너, 프로듀서들의 대답은 비슷했다.
전통적인 프로시니엄 무대 외에 변형 가능한 무대 구성
배우와 관객의 밀도 있는 거리감
완벽한 시야 확보와 음향
극장 안에 바로 붙은 연습실과 배우 대기 공간
그리고, 낮에도 열려 있는 레스토랑과 바 공간
“전통적인 프로시니엄(proscenium) 극장도 좋지만, 우리는 배우·관객이 더 ‘밀착’할 수 있는 공간, 무대 구성의 유연성이 있는 극장을 원했다. 거기에 리허설실, 좋은 그린룸, 관람 전후로 머무를 수 있는 바와 레스토랑까지.”
니카는 이 모든 요청을 반영해 하나하나 설계 도면에 녹여 넣었다. 그 결과물인 @sohoplace는 공연 제작자들이 진짜로 ‘직접 설계한’ 극장이 되었다. 이 극장은 공연 제작자들이 직접 설계에 참여한, 말 그대로 ‘창작자 중심 극장'이다. 2022년 니카는 오픈 직전, 오랜 시간 함께한 제작자들을 무대에 초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기억하시죠? 우리가 예전에 했던 그 대화들.
다 반영했고 디테일을 더했습니다. 이건 여러분이 만든 극장입니다.”
@sohoplace는 12년에 걸친 협업 끝에 완성된 공연자 중심의 공간이며, 웨스트엔드의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흐름 속에서 변화의 방향을 제시하는 예외적 사례이다. 이렇게 탄생한 극장을 언급할 때 "친근한(intimate)이라는 단어가 많이 언급되는 이유일 것이다.
“스위스 시계처럼 정교한 설계를 도시 스케일로 구현했으며, 중앙·노던·엘리자베스 지하철 노선 위에, 완벽한 진동·음향 제어 시스템을 갖춘 극장을 올렸다. 지하철 3개 노선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에 지어진 이 극장은 관객들에게 뛰어난 접근성을 제공하고 있으며 매일 밤 새로운 이야기를 품고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602석 규모의 유연한 원형 극장에서 최첨단 시설을 활용해 '극장의 한계를 뛰어넘는'(옵서버 The Observer) 공간으로 평가받은 @sohoplace는 2023년 9월 2일부터 2024년 3월 2일까지 '리틀 빅 싱즈 The Little Big Things'를 공연했다. 휠체어를 탄 출연자들이 불편 없이 무대에 등장하고 분장실을 이용하며, 관객 역시 객석으로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는 접근성을 갖춘 공간임을 입증했다.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주인공이 휠체어를 타고 날아오르는 감동적인 장면은 이 극장의 구조와 첨단 장치를 이용해 관객들에게 널리 회자됐다.
@sohoplace의 외형은 현대적이지만, 그 영감은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의 에피다우로스(Epidaurus) 극장에서 왔다. 젊은 시절 배우로 활동하던 니카는 한여름 저녁, 별빛 아래서 고대 극장에서 연기를 하던 그 마법 같은 순간을 떠올렸다. “배우와 관객이 서로를 품는 말굽형 좌석, 완벽한 시야, 잊을 수 없는 음향. 수천 년이 지나도 우리는 여전히 고대 극장에서 배웁니다.”
@sohoplace의 주조색은 짙은 남색과 황금, 복도는 흰 대리석으로 꾸며 고대 그리스 조각을 연상시킨다. 건물 외부와 복도 천장에는 별자리들이 반짝이는데, 마치 고대 극장에 입장하는 것처럼 관객들을 밤하늘 아래로 입장하는 경험을 하게 만든 것이다.
니카 번스는 글의 말미에 극장 앞에서 우연히 듣게 된 엄마와 아이의 대화를 글로 옮겼다. 어쩌면 이보다 더 간결하고 정확한 설명은 없을지도 모른다.
“엄마! 이건 뭐야?”
엄마가 대답한다.
“여기는 극장이라는 곳이야. 노래도 하고 이야기도 듣는, 마법이 시작되는 곳.”
@sohoplace는 관객이 입장하는 순간부터 이미 극장적 경험이 시작되는 장소이다. 웨스트엔드의 새로운 얼굴이자 창작자와 ‘함께 지은’ 블랙박스 극장, @sohoplace는 창작자들의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현대적인 장소로 미래의 고전을 만들어 갈 것이다.
극장 이미지 출처: 앳소호플레이스 홈페이지 sohoplac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