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루리 레인 Theatre Royal Drury Lane
드루리 레인 극장에 <템페스트> 공연을 보러 갔던 날, 옆자리 관객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저기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앉아있다고 말해주었다. 공연계의 전설적인 인물을 직접 보게 되다니! 알고 보니 오래된 이 극장에 거액을 들여 리모델링을 지휘한 이가 LW Theatre 사의 대표인 앤드루 로이드 웨버였다. 한창 잘 나가는 연출가 '제이미 로이드'를 섭외해 뮤지컬을 오래 해 온 극장에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와 [헛소동]을 세운 것도 그였다.
영국 런던 코벤트 가든 중심에 있는 Theatre Royal Drury Lane(드루리 레인 극장). 최근까지도 엘사 드레스를 입은 어린이 관객들을 여럿 볼 수 있는 디즈니 뮤지컬 [겨울왕국] 공연장으로 알려져 있다. 2021년 8월 27일 프리뷰를 시작해 2024년 9월 8일 막을 내렸다. 2,000석에 달하는 극장의 규모 때문에 주로 뮤지컬을 장기 공연하고 있지만 드루리 레인은 영국 연극사의 굴곡과 영광이 켜켜이 쌓인, 살아 숨 쉬는 "연극" 그 자체다.
드루리 레인의 첫 번째 건물은 1663년, 찰스 2세가 왕위에 복귀한 직후 세워졌다. 당시 영국 왕실로부터 합법적인 공연 허가(특허장, patent)를 받은 두 극장 중 하나로, 당시 런던에서 '정통 연극'을 올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극장은 단 두 곳뿐이었다.
Theatre Royal, Drury Lane 시어터 로열 드루리 레인
Theatre Royal, Dorset Garden 시어터 로열 도싯 가든
이 중 도싯 가든 극장은 듀크 오브 요크 극장(Duke of York's Theatre)으로 불렸지만 1709년 철거됐다. 현재 Duke of York's Theatre가 있지만 그것은 1892년 지어진 다른 건물이다.
이 두 극장은 각각 토머스 킬리그루(Thomas Killigrew)의 King’s Company와 윌리엄 대버넌트(Sir William Davenant)의 Duke’s Company에 의해 운영됐다. 나중에 이 두 극단은 1682년에 합병되어 United Company가 되었고, 이후 런던 연극계는 점차 다른 극장들로 확장됐다.
그러나 드루리 레인은 1672년 큰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고, 이후에도 1809년 또 한 번 전소되는 비운을 겪었다. 1674년에 지어진 두 번째 극장은 셰익스피어 시대부터 120년을 버텨오다 1790년 ‘안전하지 않다’는 판정을 받고 철거됐다. 극장주이자 극작가, 정치인, 결투광으로도 유명했던 리처드 브린슬리 셰리던은 그 자리에 자신의 야심과 취향을 반영한 더 크고 화려한 극장을 짓는다. 헨리 홀랜드가 설계한 이 새로운 극장은 1794년 개관하며 ‘최신 화재 예방 설비’를 갖췄다고 홍보됐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극장은 개관 15년 만인 1809년 다시 화재로 전소된다. 그리고 이 장면을 셰리던은 어딘가의 커피하우스 창밖에서 지켜본다. 치솟은 불길을 바라보며 말했다고 한다.
“자기 집 벽난로 옆에서 와인 한 잔 마시는 건 허락해줘야 하지 않겠소?”
더 이상의 사건 사고는 그만, 날 좀 내버려 두라고 한탄한 듯하다.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건물은 1812년에 지어진 네 번째 드루리 레인이다. 이 건물도 지난 세기 동안 전쟁, 경제난, 시대 변화 속에서 수없이 용도와 형태를 바꿔왔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는 드루리 레인을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웅장한 극장"이라 표현했다. 디킨스는 당시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들로 유명한 작가이자 극장 애호가였는데, 극장 문화를 사랑했던 그는 드루리 레인 극장을 특히 높이 평가했다. 여러 차례 재건과 개보수를 거치며 역사적, 건축적 가치가 뛰어난 극장임을 강조한 표현이다.
드루리 레인은 셰익스피어의 고전부터 [미스 사이공]의 헬리콥터 착륙 장면까지, 공연 예술의 역사를 관통해 왔다. [쇼보트], [마이 페어 레이디], [오클라호마!]처럼 미국 뮤지컬의 상징작들이 줄줄이 무대에 올랐다. 특히 ‘미스 사이공’에선 헬리콥터가 무대에 착륙하는 엄청난 볼거리를 선보이며 전설적인 기록(4,263회 공연)을 세웠다.
한때는 셰익스피어의 명연기로 이름을 날린 존 기엘구드가 [템페스트]의 프로스페로를 연기하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 공연에서 “이제 이 극장은 셰익스피어가 아닌 미국 뮤지컬만을 위한 곳이 되겠군”이라 말하고 지팡이를 부러뜨렸다. 그러나 이 말을 반박이라도 하듯, 최근엔 제이미 로이드의 [템페스트]와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다시 무대에 올라 ‘국민 극작가’ 셰익스피어를 이 극장에 소환했다.
드루리 레인은 2021년, 무려 6천만 파운드(약 1천억 원)의 예산을 들여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마쳤다. 뮤지컬 거장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진두지휘한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리모델링’이 아니었다.
레지던시 양식의 회랑, 코린트 양식 기둥, 노엘 카워드 조각상, 세실 비튼 바, 야외 테라스 등 극장의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레지던시 양식(Regency style)은 19세기 초 영국에서 유행한 건축과 인테리어 스타일로, 우아하면서도 절제된 고전적 아름다움을 특징으로 한다. 이 스타일은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영감을 받은 코린트 양식 기둥과 같은 고전적 요소와 조화를 이루어 극장의 품격을 한층 높였다.
특히 극장 안에 세워진 노엘 카워드(Noël Coward)의 조각상은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배우인 그를 기념하는 작품이다. 노엘 카워드는 재치 있고 세련된 희곡으로 영국 연극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극장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세실 비튼 바(Cecil Beaton Bar)는 유명한 사진작가 겸 무대 디자이너였던 세실 비튼의 이름을 딴 공간으로, 극장의 문화적 유산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있다. 야외 테라스 역시 극장의 고전미와 현대적 편의성을 연결하며 관객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또한 드루리 레인은 리모델링을 하면서도 역사를 보존했다. 19세기 건축가가 설계한 우아한 계단과 좌석마다 ‘왕관’과 ‘왕자 깃털’ 자수를 새겨 200년 전 왕가의 불화까지 담아냈다. 드루리 레인 극장 좌석에는 ‘왕관’ 자수와 ‘왕자의 깃털’ 자수가 놓여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 자수들은 극장 설계에 얽힌 19세기 영국 왕실의 ‘진짜’ 불화를 상징하는 의미 깊은 표시다. 19세기 초, 극장을 설계한 건축가 벤자민 와이엇은 당시 ‘미친 왕’ 조지 3세와 그 아들인 왕세자(후일 조지 4세 왕) 사이에 심각한 불화가 있었던 사실을 건축에 반영했다. 둘은 거의 평생 사이가 나빴는데, 극장 안에서조차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특별한 설계가 들어간 것이다.
와이엇은 극장 입구부터 내부 로비까지 두 개의 웅장한 계단을 만들었다. 하나는 ‘왕’ 조지 3세가, 다른 하나는 왕세자가 따로 이용하도록 설계했다. 이로써 둘은 극장 안에서 마주치지 않고 자신들만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극장 좌석은 ‘왕의 쪽’과 ‘왕세자의 쪽’으로 나뉘어 있다. 왕 쪽 좌석에는 ‘왕관’ 자수가, 왕세자 쪽에는 ‘왕자의 깃털’ 자수가 수놓아져 있다. 이 자수들은 단순히 화려함을 위한 장식이 아니라, 두 왕가 인물 간 갈등을 상징하는 역사적 표식이다.
1922년 이후 ‘보기엔 좀 별로지만 좌석은 많았던’ 공간을, 관객에게 편안한 시야와 동선을 제공하는 ‘21세기형 고전 극장’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관객이 길게 돌아 계단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했던 관람 동선은 사라졌고, 무대는 관객석과 자연스럽게 연결돼 ‘극장 전체가 하나의 무대’가 될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심지어 48시간 안에 ‘극장 전체를 원형 무대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오래된 웨스트엔드 극장에서 쉬는 시간마다 여자 화장실 앞에 길게 줄을 서게 되는데, 이 부분도 개선했다.
1957년 이후 거의 60년 만에 드루리 레인에서 셰익스피어 작품이 다시 무대에 올랐다. 2024년, 제이미 로이드가 연출한 [템페스트]와 [헛소동]이 잇따라 공연되며, 극장의 긴 역사 속에 셰익스피어의 정신이 다시 살아났다. 시고니 위버를 내세운 [템페스트]는 기대에 못 미쳤지만 제이미 로이드 컴퍼니 특유의 미학이 드러난 무대가 돋보였다. 톰 히들스턴이 춤을 추며 등장하는 [헛소동]은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두 프로덕션 모두 광활하고 깊은 무대를 영리하게 활용했다. 이 좋은 극장을 뮤지컬에게 내주어야 한다며 지팡이를 부러뜨렸던 존 기엘구드가, 어디에선가 이 모습을 흐뭇하고 바라보고 있지 않았을까.
200년 전 영국 왕실의 '극장 밖 드라마'까지 알고 나면, 시어터 로열 드루리 레인에서 단순히 공연만 보는 것이 아깝게 느껴진다. 드루리 레인은 살아있는 박물관 같다. 불타고 무너졌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비워졌다가 채워지는 이 극장의 이야기는 공연만큼이나 흥미롭다.
참고자료
https://londonist.com/london/history/drury-lane
https://thelane.co.uk/the-history
도서 London Theat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