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마 웨어하우스 Donmar Warehouse
런던 코벤트 가든 근처, ‘세븐 다이얼스(Seven Dials)’는 마치 시곗바늘처럼 일곱 갈래의 길이 기념탑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독특한 지역이다. 1690년대 초, 국회의원이자 도시 개발가였던 토머스 닐이 고급 주거지를 목표로 설계한 이 방사형 구조의 도시는 마치 잘라놓은 케이크 조각처럼 생겼다. 하지만 복잡한 거리 구조는 오히려 상류층의 외면을 불러왔고, 이후 빈곤층이 밀집하며 런던에서도 악명 높은 슬럼 중 하나로 전락하기도 했다.
지금의 세븐 다이얼스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독립 부티크와 감각적인 레스토랑, 고급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들이 자리를 잡으며 조용하고 세련된 감도의 거리가 되었다. 기념탑 바로 앞 캠브리지 극장에서는 2011년부터 뮤지컬 《마틸다》가 장기 공연 중이다. 그리고 이 거리에는 런던에서 가장 독창적인 오프 웨스트엔드 공연장이 하나 숨어 있다. 바로 ‘돈마 웨어하우스 Donmar Warehouse’다.
한때 이 건물은 지역 양조장의 홉 저장고와 맥주 저장실, 코벤트 가든 시장의 바나나를 익히던 숙성 창고였다. 그러다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가 이곳을 극장으로 개조하면서 새로운 예술적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바나나 대신, 이제는 작품이 익어가는 창고. Donmar Warehouse는 지금, 런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소극장 중 하나가 되었다.
극장의 이름인 Donmar는 창립자 도널드 앨버리(Donald Albery)와 그의 아내였던 시슬리 마거릿(Cicely Margaret)의 이름 앞 세 글자를 따 만든 것이다. 도널드 앨버리는 1960년대 런던의 새로운 연극적 흐름을 무대 위에 올리기 위해 애쓴 인물로, '연극 임프레사리오'—즉, 제작자이자 후원자, 기획자—로 불렸다. 마거릿은 직접 희곡을 읽고 도널드에게 조언을 건넸으며, 그는 그 조언을 자주 따랐다. 두 사람은 결국 이혼했지만, Donmar라는 극장 이름 안에 헤어지지 못하고 남아 있다.
런던에 머문 지난 3년간 나는 이 극장을 자주 찾았다. 여전히 창고라는 이름처럼 이곳은 친숙하고 정겹다. 무대와 객석의 구조는 프로시니엄도, 블랙박스도 아닌 중간 어딘가에 있다. 이 극장에서 객석에 입장할 때 경험한 독특한 감정을 글로 옮겨 브런치에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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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극장은 디테일에서도 자신만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프로그램 북은 항상 같은 크기로 제작되며, 소장하고 싶을 만큼 깔끔하고 세련됐다. 포스터 디자인에도 일관성이 있어, 하나의 시각적 정체성을 이룬다.
Donmar Warehouse는 단 251석 규모의 작은 극장이다. 그중 일부는 무대보다 천장에 더 가까운 맨 뒤 스탠딩 좌석이다. 그만큼 작은 공간이지만, 이곳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은 웨스트엔드나 브로드웨이로 진출하며 큰 반향을 일으켜왔다. 극장 규모와는 무관하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티켓을 구하기 힘든 것도 당연하다.
나는 이 극장에서 유난히 자주 눈물을 흘렸다. 《Next to Normal》을 보면서는 정말 엉엉 울었고, 《벚꽃동산》에서는 그 시대와 인물들의 정서를 오래 곱씹게 되었다. 아마도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가 극히 좁기 때문에, 감정의 결이 더 또렷하게 와닿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연마다 공간을 새롭게 구성하고 활용하는 방식은 늘 새롭고 창의적이다. 극장으로서는 무대와 객석이 너무 가깝고, 무대 양쪽 공간이 거의 없는 이 창고에 다른 세상을 구현해 내는 것이 놀랍다. 여전히 창고라는 이름을 간직하고 있는 이곳이 바나나를 숙성시키던 곳이었다니 흥미롭다. 창고였던 이곳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삶을, 타인의 삶을 생각해 보게 만든다. 오늘도 연극은 삶을 숙성시키고 있다.
참고자료
https://database.theatrestrust.org.uk/resources/theatres/show/3089-donmar-warehouse
https://www.donmarwarehouse.com/pQ2AHv/about/past-productions
http://www.arthurlloyd.co.uk/DonmarWarehouse.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