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작 Dec 01. 2023

아빠가 뛰어가고 있어요

학교까지 전력 질주

평화로운 월요일이었다. 아이들 학교 끝나고 테니스 수업을 시작하는 날이었다. 외식비를 줄여보고자 시간 맞춰 도시락을 싸기로 했다. H마트에서 사놓은 유부초밥 거리를 꺼냈다.


전기밥솥 내솥을 씻어 5킬로그램 봉투에 얼마 남지

않은 쌀을 털어 넣었다. 그런데 길쭉한 쌀이 섞여 있었다. 남편이 얼마 얼마 안 남은 쌀들을 합쳐놓은 것을 모르고 있었다. 유부초밥을 만들어야 하는데 날아다니는 쌀이라니. 마음이 급해 그냥 취사 버튼을 눌렀다.


밥이 되면 바로 만들 수 있도록 유부를 살짝 짜서 접시에 꺼내놓고 싸가지고 갈 도시락통도 꺼내놓았다. 단백질도 보충할 겸 냉장고에 있던 남은 재료로 계란말이도 했다. 날이 차니 국물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텀블러에 뜨거운 물을 붓고 코인형 멸치육수도 하나 넣었다.


30분 만에 밥이 다됐다. 스테인리스볼에 밥을 더는데 전혀 찰기가 없었다. 단촛물과 유부초밥에 동봉된 후레이크를 뿌리고 주걱으로 섞으며 밥을 식혔다. 밥을 빠르게 유부 안으로 밀어 넣었다. 똑같은 양을 두 통에 나누어 담고 뚜껑을 닫아 배낭에 넣었다.


아이들이 갈아입을 옷과 테니스채도 챙겼다. 워낙 비가 자주 내리기 때문에 우비를 챙겨 입고 거기에 달린 커다란 모자를 썼다. 먹거리가 든 배낭과 옷이 든 에코백, 테니스채를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섰다. 이미 어두워진 거리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애들 아빠와 아이들이 도착할 시간에 맞추려고 빠른 걸음으로 테니스장으로 걸었다.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Hello?"

‘둘째 아이 이름’과 ‘아직‘ ’도착‘이라는 단어가 입력됐다. 오늘 시작하기로 한 테니스 수업을 말하는 것이라고 자체적으로 해석했다. 무언가 또 착오가 있었나 보군. 시간을 잘못 등록했나 생각하며 답했다.

우리 수업은 5:30이야
- 방과 후는 4:15에 끝나(는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상황을 파악하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어디서 전화 주셨다고요?라고 물으려는데 당황해서 영어로 나오지가 않았다. 대신 내 입에서 아이들 학교 이름이 튀어나왔다. 전화 속 목소리는 지친 투로 맞다고 했다.


귀에서 휴대전화를 떼어 들여다보니 4:25이었다. 하교 시간은 4:15인데 이미 십 분이 지나 있었다. 너무 놀라서 미안하다, 곧 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바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애들 데리러 안 갔어?
- 아, 맞다!
오늘 친구도 데려다주는 날인데
- 아, 그렇지. 내가 가는 거였지.

까맣게 잊고 있었는지 그도 무척 놀란 목소리였다. 나는 비 오는 삼거리에서, 횡단보도가 복잡하게 꺾여있는 4차선 도로에서 무단 횡단을 하려고 자세를 잡았다. 머릿속으로 현재 위치에서 누가 학교에 더 가까이 있는지 거리를 생각했다. 먹거리에 옷가방에 테니스채를 짊어지고 뛰어야 하다니. 그러나 학교까지 가는 버스도 없거니와 그걸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잡아 탈 택시도 없었다. 남편은 자기가 지금 바로 뛰어가겠다고 했다. 나보다 그가 빠를 것이므로 그러라고 했다.


통화를 하면서 월요일마다 함께 하교하는 아이 친구를 떠올리니 손이 덜덜 떨렸다. 아이가 기다리지 않고 그냥 걸어 나왔다면, 아이가 길이라도 잃는다면 어떻게 하지? 나는 걸려왔던 학교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다급한 내 마음과 달리 천천히 녹음된 음성 안내가 끝나고 나서야 전화가 연결됐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연결되자마자 끊겨버렸다. 발은 분주하게 빗 속에 횡단보도를 건너며 떨리는 손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세 번만에 아까 그 선생님과 다시 통화할 수 있었다.

세바스티안은요! 그 애가 제 아이와 같이 있나요?
- 여기 같이 있어. 둘째랑 그의 형이랑.
감사해요 정말 미안해요 금방 갈게요

천만다행이었다. 그래도 집에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을 부모가 걱정할까 싶어 아이 친구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을 하는 중인지 받지 않았다. 춥기도 했지만 너무 놀라서 손이 계속 떨렸다. 아이 친구 아빠와 엄마, 남편과 내가 같이 있는 왓츠앱 그룹에 메시지를 남겼다.

4:32 이런 말을 하게 되어 미안해. 남편과 나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됐어. 남편이 지금 데리러 가고 있어. 다시 한번 사과할게.
4:36 방금 학교에 전화로 세바스티안이 둘째랑 같이 있는 걸 확인했어. 다시 한번 미안해.

일주일에 딱 하루 하굣길에 데려다 주기로 한 건데 그 한 번을 챙기지 못했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엇보다 친구들이 모두 떠난 빈 학교에 셋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생각을 하니 아이들에게도 미안해졌다. 아이들이 외치는 원망 섞인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아이 친구 아빠에게 먼저 답이 왔다.

4:39 괜찮아. 우리도 잘 그래.

잔뜩 걱정됐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동시에 남편 메시지가 들어왔다.

4:39 미안. 지금 아이들 픽업 했

얼마나 급했는지 “pick them u”. 마지막 p도 미처 못쓰고 메시지를 보냈다.

4:39 별 일 아냐.
4:40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
4:41 전혀 걱정하지 마. 맞아, 우리도 전에 그런 적 있었어.

다행히 친구를 무사히 데려다주고 아이들은 테니스장에 도착했다. 정신이 아득해지도록 당황스러운 몇 분이었다. 남편 얼굴을 보자마자 어떻게 학교까지 13분 만에 뛰어갔냐고 물었다. 전에 체성분 분석하며 측정했을 때 몸 나이가 29세로 나왔다며 자랑스럽게 웃었다.

여보, 그런데 뇌 나이는?

오후 4:30. 일찍 해가 지는 런던의 겨울
매거진의 이전글 초록의 위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