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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작 Nov 24. 2023

초록의 위로

식물이 주는 행복

1년 전 런던으로 떠나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10년을 살았던 집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해외로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은 극히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을 나누거나 버려야 했다. 신혼살림을 마련할 때 샀던 진한 오렌지색 소파는 아무도 가져간다는 이가 없어 결국 쓰레기가 되었다. 대형 폐기물 수거를 기다리는 동안 비를 맞아 망가져가는 소파를 보면서 마음이 쓰렸다.

토분에 심어 나란히 키웠던 식물들을 나누는 것도 숙제였다. 수형이 예쁘게 잡혀 잘 자란 몬스테라 화분 하나는 전에 몬스테라를 키워봤던 후배가 차로 싣고 갔다. 일부는 이미 식물들로 가득한 시댁으로, 친정으로, 옆집 옥상 정원으로 보냈다. 코로나로 모두가 힘들었던 시기에도 식물들은 큰 위로가 됐었다.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면 1시간 거리를 출근하는 대신 식물을 살필 시간이 있어 감사했다. 먼지가 앉은 잎을 닦아주고, 흙이 말랐는지 들여다보며 물을 주며 십 년 가까이 돌봤던 아이들이었다. 그런 식물 화분들을 보내는 것은 다른 물건을 보낼 때보다 깊이 아쉬웠다. 


런던에 와서 에어비엔비에서 보내는 동안에는 짐을 늘리지 않으려 애썼다. 3주 후에 거처를 옮겨야 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을 사는 것을 미뤘다. 계약한 집으로 들어왔을 때 가구와 가전이 갖춰진 집이었음에도 급하게 필요한 것들이 많았다. 캐리어 4개를 꽉 채우고도 배낭에 쇼핑백에 짐이 그득했는데도 밥그릇도 접시도 냄비도 없었다. 우리는 차도 없었고 우버는 비쌌기 때문에 먼 곳에 있는 이케아에서부터 짐들을 나누어 메고 트램을 타고 집까지 걸어 물건을 날랐다.

생필품을 사러 이케아에 두 번째 간 날, 어제도 한참을 봤던 몬스테라 화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화분들은 무빙워크 아래쪽에 전시되어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무빙워크에서 화분만 쳐다봤다. 아주 싱싱하고 튼튼해 보였다. 사실 식물을 살 처지가 아니었다. 매트리스 하나 무게만도 상당했다. 베개와 덮을 것도 부피가 컸다. 짐은 이미 너무 많으므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화분은 부담이 될 게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물을 꼭 사야만 했다. 서울에서 식물을 정리할 때부터 집에 들어가면 화분을 들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망설이다 남편에게 사도 되겠냐고 물었고 남편은 늘 그렇듯 짧게 "사"라고 대답했다. 

야무진 몬스테라는 아무 데도 다치지 않고 집에 도착했다. 해가 잘 드는 창가에 놓아주고 물을 흠뻑 주었다. 삭막했던 집에 생기가 돌았다.


반짝이는 연두색 잎이 예쁘다


몇 주가 지나자 몬스테라는 새 잎을 피워내며 몸집이 커졌다. 사 올 때 담겨 있었던 임시 화분에서 옮겨주어야 했다. 아마존에서 각각 크기가 다른 화분 4개 세트를 샀다. 흙도 한 봉지 샀다. 토분을 사고 싶었지만 언제 이사를 가게 될지 알 수 없으므로 가벼운 플라스틱 화분을 골랐다.

몬스테라는 커진 화분에서 더 키가 크고 널따란 찢잎들을 펼치며 자랐다. 창틀에서 빛을 많이 보고 자라라고 옆으로 퍼지지 않고 위로 자라도록 수형을 잡아주었다. 집에 있는 나무젓가락과 빨래집게, 빵끈 등을 이용해 방향을 잡아주면 그쪽으로 컸다. 플라스틱에 직접 닿지 말라고 빨래집게와 줄기 사이에 휴지심을 끼워 넣어 주기도 했다. 반짝이던 연두색 잎은 색이 짙어지고 두터워지며 먼저 난 잎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가끔 물만 줄 뿐인데 기특하게도 쑥쑥 잘 자랐다. 수형을 잡아줬지만 옆으로 자란 줄기에서 잎이 여러 장 나와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다시 분갈이를 해주어야 했다. 비가 안 오는 맑은 날을 골라 신문지와 화분을 들고 앞마당으로 나갔다. 

화분을 기울여 몬스테라 줄기를 잡고 빼냈다. 뿌리 부분이 화분 안에 단단히 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으로 위쪽 흙을 조금씩 파내고 조심스럽게 당겼다. 소용없었다. 옆부분을 화분 벽에서 뜯어내듯 화분 방향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흙을 더 파낸 후에야 거대한 뿌리를 볼 수 있었다. 마치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듯 뿌리가 화분 모양대로 자라 있었다. 공중뿌리가 제멋대로 자라는 게 싫어서 흙 속으로 넣어주었더니 아주 굵고 기다란 뿌리들이 엉켜 있었다.

손으로 살살 풀어주다가 나중엔 뜯어냈다. 너무 긴 것들은 가위로 잘랐다. 몬스테라는 큰 줄기 두 개에서 여러 갈래로 뻗어 있었다. 수형을 잡을 수 없이 기울어진 굵은 가지는 칼로 잘랐다. 아직 찢어지기 전인 작은 잎들이 달린 한 뿌리와 옆으로 자라 잘라낸 가지는 물꽂이 했다. 작은 것은 할라피뇨 소스병에, 큰 것은 누텔라 병에 딱 맞았다. 흙이 모자라서 물에 임시로 꽂아두었는데 물에서도 잘 자란다는 말을 듣고 그냥 거기서 키우기로 했다.

한 달 정도 지나니 투명한 유리병 안에 하얗고 굵은 뿌리들이 자라났다. 아이는 뿌리가 당근처럼 생겼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당근도 뿌리채소네? 물꽂이 한 덕에 아이가 뿌리를 관찰할 수도 있었다.


집에 오는 길, 우리 집 창문을 올려다보면 몬스테라가 늘 거기에 있었다. 지는 해를 따라 벽에 예쁜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공기를 맑게 해주는 역할도 부지런히 했을 것이다. 뿌리를 내리고도 튼튼한 줄기들을 뻗어내고 잘 자랐다. 가끔 흙 위로 곰팡이가 피기도 했고 날벌레가 나온 적도 있었지만 잘 이겨냈다. 이 몬스테라를 묵직한 토분에 언제 옮겨 심어 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언제 이사를 가게 될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지 돌아갈 수 있을지 얼마나 더 머물 수 있을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그렇지만 내가 여기 머무는 동안 식물들은 살아 숨 쉬며 매일 나에게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5파운드(8천원) 화분은 1년만에 화분 네 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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