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차 - 까미너
어김없이 알람 소리가 나의 단잠을 깨웠다. 눈을 감고 비몽사몽 한 채로 천장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간헐적으로 들리는 바람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제의 지랄 같은 날씨가 생각나면서 '계속 이렇게 비가 내린다면 이곳에서 오늘 하루 더 머무르겠다'라고 다짐하고 침낭에서 꿈지럭꿈지럭 나와 아무도 없는 도미토리를 괜히 한 번 훑어보고는 기지개를 켰다. 커튼을 걷고 창문 밖, 비 내리는 세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한껏 운치 있었고, 나는 배고픔에 못 이겨 몸을 움직일 때까지 멍하니 서서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저녁 식사를 했던 식당에는 정갈하게 조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당연히 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벌써 한 노부부가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가볍게 눈인사를 주고받고 나서 접시에 음식을 담아 자리를 잡고 먹기 시작했다. 예상외로 조식이 너무 맛있어서 노부부가 나간 뒤에도 한참을 더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사이에 비는 그쳤고 더 머무를 명분이 없어진 나는 길에 오를 준비를 하였다.
다리의 피로가 충분히 풀리지 않았지만, 오늘 역시 2개의 도시를 한 번에 갈 계획이었다. 무리를 해가면서 빠르게 가는 이유는 포르투갈의 제2 도시이자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도시 ‘Porto' 때문이었다. 포르투갈 여행을 하는 사람 치고 포르토를 들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포르토를 여행했던 사람 치고 이 도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 도시는 무리를 해서라도 빨리 도착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만약 오늘 2개의 도시를 가게 된다면 하루의 여유가 생겨 그 이튿날 포르토에 도착해서 더 오래도록 머무를 수 있었다.
비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은 세상으로 나와 어제 겪은 고난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는 다리로 오늘의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가야 하는 길이 멀었기에 서두르지 않았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먼저 *"Bom Dia!" 인사하는 나는 9일 차 까미너였다.
* 봄 디아(Bom Dia): 포르투갈 언어로 ‘좋은 하루‘라는 뜻의 인사말이다.
하루하루 쌓인 경험으로 앞으로 걸어야 하는 길이 머릿속에 그려지니 자연스럽게 여유가 생겼다. 오랜 시간을 달려야 하는 마라톤 선수처럼 호흡을 조절하고, 산책을 나온 주민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여러 번 순례자의 길을 걸었던 순례자처럼 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어제에 이어 지루한 길들이 계속되었기에 처음으로 이어폰을 꺼내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노래 리듬에 맞춰 통통 튀기기도 하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이 확인되면 큰 소리로 좋아하는 노래들을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래 듣는 것도 지겨워져 이어폰을 빼고 뭐 재밌는 것이 없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때마침 양이 풀을 뜯고 있었고 나는 양처럼 입을 오물오물 거리며 양을 빤히 쳐다보았다. 양도 그런 내가 신기했는지 나를 쳐다보며 입을 오물거렸다.
그렇게 나아가다 어느 작은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포르투갈을 도보로 다니면서 이 나라에 대해 알게 된 것들 중에 하나는 개를 키우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 개들의 크기가 예사롭지 않다는 데 있다. 간혹 귀여운 강아지들도 몇 있었지만 마주치는 대부분의 개들은 눈빛이 날카로운 커다란 몸집의 개들이었다. 거기에 더해 이 개들은 낯선 이가 지나가면 가만히 보내주는 법이 없었는데, 어찌나 사납게 짖어대던지 마치 온 동네 사람들에게 ‘지금 낯선 사람이 지나가고 있으니 알고 있으셔!’라고 소리쳐 알리는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작은 마을에서도 집 앞을 지나려고 하자 그 집의 마당에 있던 개가 나를 따라오며 떠나갈 듯이 큰 소리로 짖기 시작했다. 어째선지 약이 바짝 오른 나는 양을 보며 우물거렸듯이 개를 똑바로 쳐다보며 똑같이 짖어댔다. 그랬더니 이 개가 자극을 받았는지 날뛰기 시작하면서 말 그대로 미친개처럼 짖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인도에서 개에게 물려 광견병에 걸린 친구가 생각났고 갑자기 두려움이 솟구쳐 뒤도 안 돌아보고 달달거리는 킥보드를 끌며 그 개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쳤다.
다시는 개를 도발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그 마을을 벗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은 교차로로 이어졌고 원형 교차로 중앙에는 흰색 무언가가 우뚝 솟아있었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원형 테두리 안에는 흙 위로 큼지막한 돌들이 널려있었고, 그 중앙에 위로 좁아지는 기둥이 있었다. 기둥 위로는 망토를 뒤집어쓴 채 십자가를 손목에 걸고 두 손은 꽉 쥔 여인의 조각상이 어느 한 지점을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누군가 가져다 놓은 꽃들이 놓여 있었는데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전체적으로 묘하게 조화로웠다.
교차로에 서서 꽤 오랜 시간 그 조각상을 올려다봤다. 이 여인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고, 이 여인을 찾는 이들은 누구이며, 왜 이곳에 꽃을 두고 간 것일까. 이 조각상을 종교적인 어떤 것 혹은 상징적인 무언가로 인식하지 않고 예술 작품의 하나로 보았기 때문일까, 언젠가 달리의 '창가에 서 있는 소녀'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던 것처럼 이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현실 세계의 시공간을 초월한 어떤 신비로운 세계에 속해있었다. 차가 오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이 여인을 등진 채 나아가기 전까지.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점점 걸음 속도가 느려지고 있음이 느껴졌고 이제 정말 더 이상은 못 걷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처럼 몸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움직였고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니 또 걸을만해졌다. 나의 의지로 발을 내딛는 것보다는 반복된 동작에 익숙해진 근육들이 자체적으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인체의 신비를 온몸으로 느끼며 걷고 있는데 내리막길이 보였다. 반쯤 정신을 놓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킥보드에 몸을 올렸다. 바퀴가 고장 난 뒤로 탈 생각을 전혀 못 하고 있다가 무심결에 탄 것이었는데, 바퀴가 심하게 덜덜 떨리며 불안하기는 했으나 굴러가기는 했다.
오랜만에 탈 것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엄청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소리를 질렀고, 어째서 지금까지 킥보드를 탈 생각을 전혀 못 하고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내리막길이 끝나고 평지가 나오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불안정한 바퀴는 제 기능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존에 들이던 힘의 2배를 써야 비로소 원 속도의 60% 정도로 나아갈 수 있었다. 따라서 내리막길이 나올 때만 간간히 킥보드를 타곤 했는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금세 평지에서 킥보드를 타지 못 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불만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아쉬움과 불만이 짜증으로 변할 힘도 없을 때 나는 산길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하나의 도시를 지나고 두 번째 도시이자 오늘의 목적지인 ‘Sao Joao Da Madeira'가 반 정도 남은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약간은 몽롱한 정신으로 적당한 경사의 꽤나 탄탄해 보이는 흙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까진 한 번도 산길에서 킥보드를 탄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지금까진 이렇게 킥보드를 탈 수 있을 것 같은 산길이 없었다. 잠깐 멈춰 서서 고민하는 사이 얼마 전 내리막 길에서 두려움에 못 이겨 킥보드를 놓아버려 넘어진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망설임은 잠시, 나는 또 어느새 킥보드에 올라 있었다. 넘어졌을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의 나는 광기 서린 눈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을 노려보고 있는다는 점이었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긴다는 생각으로 발을 굴렸다. 이제는 산속에서도 킥보딩을 하는 나는 9일 차 까미너였다.
이때까진 이런 나의 모습이 측은했는지 비 예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가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목적지가 8km 정도 남았을 때쯤 갑자기 엄청난 폭우를 동반한 바람이 나를 덮쳐 왔다.(그렇다. 바로 그 바람이다.) 지금까지 내렸어야 할 비를 모두 모아두었다가 한 번에 들이붓는 것처럼 말 그대로 물을 쏟아부어댔다. 지쳐있던 내게 이 비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는데, 나의 몰골을 보고 사람들이(심지어 자동차조차) 나를 피해서 가게끔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홍해를 가르듯 편하게(?) 킥보드를 끌며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호스텔에 도착했다. 호스텔 직원이 나의 모습을 보고 움찔하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내쫓지는 않았고 나는 지친 몸을 누일 수 있었다.
#오늘 걸은 길
- 출발: 09:05 / 도착: 18:30
- 거리: 약 46km
- 경비: 36.3 Eu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