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17일 차 - 마지막 순간을 향하는 길
서두르는 일 없이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면서 길을 나아갔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무미건조한 시간이자 길이었다. 12시가 조금 넘은 시각, 눈앞의 알베르게는 문이 닫혀 있었다. 한 도시를 더 가볼까 싶다가 이내 포기하고, 그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관리자가 오길 기다렸다. 멀지 않은 마지막 순간을 앞에 두고 도시 하나를 더 나아갈 의지와 열정을 상실한, 그런 상태였다.
주저앉아 있는 내게 누군가 걸어와 말을 걸어왔다. 귀찮고 지루한 대화가 될 것 같은 느낌에 대충 얼버무리면서 관리자가 오는지 힐끔힐끔 주위를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리자가 오는 것이 보였고 나는 구세주를 만난 사람처럼 그녀를 반갑게 맞으며 냉큼 공립 알베르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 왔듯이 도장을 받은 후 방을 안내받고 간략하게 이용규칙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텅텅 비어있는 도미토리의 수많은 침대를 둘러보며 가장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고르고 짐을 풀었다. 그리고 곧장 샤워를 하러 갔는데 웬걸, 따뜻한 물이 콸콸 쏟아졌다. 뜨신 물이 주는 안락한 행복감에 기분이 한껏 좋아지고 숙소에서 쉬는 것보다 도시를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옷을 간편하게 갈아입고 상쾌하고 맑은 기분으로 도시를 둘러보기 위해 알베르게를 나섰다.
먼저, 오는 길에 봤던, 야외 테라스까지 사람이 꽉 차 있어 호기심이 일었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근처로 가자 한 남자가 분주하게 큰 스테인리스 통에서 삶아진 문어를 꺼내 나무 그릇에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담는 모습이 보였다. 빈자리 없이 사람이 꽉 찬 식당에서는 군침 도는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 냄새에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먹을 생각 없이 구경만 하러 간 것이지만, 나는 결국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버렸다. 평소 문어를 좋아하진 않지만 거의 모든 테이블에 올라간 문어를 맛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어 10유로가 넘는 문어 한 접시와 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식당 손님들은 동네 사람이 주를 이루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나를 흥미롭게 쳐다보고 나는 그런 그들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얼마 후, 원형으로 된 나무 그릇에 한 입 크기로 썰린 문어가 빨간 고춧가루 비슷한 것이 뿌려져 나왔다. 같이 나온 이쑤시개에 하나 꽂아 입에 넣어 씹어 보았다. 세상에, 별다른 양념을 한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정말 정말 맛있었다. 태어나서 문어 요리를 몇 번 먹어보진 않았지만 살면서 먹어본 것 중에 가장 맛있는 문어였다. 함께 나온 하우스 와인과 함께 먹으니 꽤 많다고 느껴졌던 문어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텅 빈 접시만이 남았다. 영어권 나라만 되었어도 문어에 대체 어떤 마법을 부린 건지 물어봤을 텐데, 스페인어를 못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예상치를 훨씬 상회하는 만족도를 얻고 기분 좋게 마을 중심부를 향했다.
마을을 걷다 보니 킥보드를 타고 돌아다니는 어린 친구들이 보였다. 괜한 동지애가 느껴지면서 설명하기 어려운 뿌듯함과 만족감이 일었다. 뿌듯함과 만족감이 어린 시선을 의식했는지 자신들을 바라보는 나를 꼬마들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응수하였다. 멋쩍음을 느끼며 동네 구경을 계속했다. 평화로움과 평안이 깃든 산책이었다.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근방의 마트에서 저녁으로 간단하게 만들어 먹을 음식 재료들을 사서 알베르게로 돌아갔다. 곧장 주방으로 향하는데 안쪽에서 호탕한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들어봤던 소리라고 느끼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는 순간, 오늘 역시 편히 자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와서 주방을 사용하고 있던 이들은 그제와 어제 이갈이와 코골이의 오케스트라로 나의 잠을 방해한 두 명의 서양인 커플이었다.
한정적인 주방에서 각자의 저녁을 준비하며 그들과 몇 마디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 짧은 대화로 그들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다. 커플이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 달리 두 명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한 친구사이였고, 두 명 모두 엄청나게 유쾌한 친구들이었다. 낙엽만 떨어져도 좋을 나이는 지났을 텐데, 그들은 몇 개의 핫케이크를 만드는 그 짧은 시간 내내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쉬지 않고 떠들고 웃어댔다. 이틀 연속 잠을 못 자게 한 장본인인지라 처음에는 떨떠름한 느낌이 없진 않았으나, 사소한 것들로 옥신각신하며 즐겁게 저녁을 먹는 모습이 참 보기 좋고 호감이 갔다.
허물없는 두 사람을 보자니 한국에 있는 한 친구 생각이 났다.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감 없이 표현할 수 있는 편안한 친구. 짓궂은 농담과 장난에도 상처 받지 않고 웃어넘길 수 있는 오래된 친구. 그 친구와 순례자의 길을 걸었다면 ‘나도 외롭지 않게 저 친구들처럼 즐겁고 재밌게 걸을 수 있지 않았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또, 그 친구와 보냈던 시간들이 떠올라 그 친구가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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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으로 확인한 기상에서는 현재시간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막상 나와 보니 비는 내리지 않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의 날씨도 정확하게 나타내는 것이 힘든데 하물며 하루 이틀 뒤, 일주일 뒤의 날씨를 정확히 예보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과 함께 오늘의 길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보다 먼저 출발했던 두 유쾌한 서양인 친구를 지나치게 되었다. 밝게 인사해주는 그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며 목적지를 향해 발을 굴렸다.
노란 화살표가 이끌어주는 대로 길을 가는데 앞에서, 뒤에서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를 지나쳐갔다. 어림잡아 20팀 정도 그렇게 나를 지나치자 그간 외로웠던 순례자의 길에 활력이 돌았다. 순례자의 길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파생된 에너지는 내게 전해져 나를 한껏 고무시켰다. 어제와는 다른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마지막 순간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재점화된 나는 두 개의 도시를 가 내일 정오 정도에 산티아고에 도착하기로 마음먹었다. 내일이면 산티아고에 도착하게 된다니,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시작한 나의 순례자의 길이 끝이 난다니, 다양한 색의 생각들이 물감을 덧칠하며 그림을 그리듯 생각에 생각을 덧칠해 갔다.
참 이상하게도 제일 힘들었던 순간들이 가장 많이 생각이 났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넘어서지 못할 것 같은 순간들이 어느새 자랑스러운 추억으로 자리 잡았다. 지나간 일들을 떠올리다 내일의 나를 상상해봤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있는 대성당을 마주하고 있는 나를. 킥보드와 나란히 서서 대성당을 바라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어느 글에서 읽었던 누군가처럼 벅차오름 혹은 감격스러움에 눈물을 흘리게 될까? 아니면, 아무런 심적 동요 없이 무미건조하게 그 건축물을 바라보게 될까? 내일이 되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되겠지. 그리고 지금은 알고 싶어도 알 수 없겠지.
톡톡, 빗방울이 생각 많은 나의 머리를 두드렸다. 우비를 꺼내 입기 귀찮았던 나는 우비 대신 모자만 꺼내 머리를 덮었다. 오늘의 두 번째 목적지이자, 산티아고 전의 마지막 도시가 가까워 올 무렵 사람이 바글거리는 식당이 보였다. 오늘은 꼭 고기를 먹겠노라 다짐했는데 살펴보니 때마침 그 식당이 바로 바비큐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었다. 더 잴 것도 없이 축축하게 젖은 상태로 식당 문을 열었다. 쏟아지는 시선들에 아랑곳 않고 혼자 왔음을 알린 뒤 안내받은 구석진 자리에 가서 앉았다. 정신없이 바쁘기 때문일까 퉁명스러운 직원에게 가장 맛있어 보이는 등갈비 바비큐를 주문했다. 직원은 친절하지 않을지언정 음식의 맛과 가격은 그 어느 곳보다 친절했다. 비에 젖은 상태로 따뜻한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으니 몸이 나른해졌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있어 애써 나른함을 이겨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에 이곳의 음식이 격렬하게 그리워질 날이 올 거라 예상하며 얼마 남지 않은 길을 나아갔다.
비는 점점 더 굵어져 어느새 따가울 정도가 되었다. 홀딱 젖은 나는 시간이 갈수록 몹시 추워졌다. 오들오들 떨며 알베르게에 도착했지만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알림판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추위 속에서 하염없이 직원을 기다렸다. 직원은 거의 1시간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늦게 온 것에 대한 분노보다 이제서라도 온 것에 대한 감사가 더 컸던 나는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엄청나게 큰 도미토리는 텅텅 비어 적막한 쓸쓸함이 감돌았다. 스페인에 온 뒤 혼자 자는 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례자의 길 첫날, 소방서에서 외로이 혼자 눈을 붙였던 날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외로운 순례자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길도 내일이면 끝이 나고 그와 동시에 나는 (아마도) 세계 최초로 킥보드를 타고 리스본에서 산티아고까지 순례자의 길을 걸은 사람이 되리라. 아쉬움과 설렘의 줄다리기 속 긴장을 뒤로하고 어느새 잠에 들어 순례자의 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
#오늘 걸은 길 (16일 차 / 17일 차)
- 출발: 08:13 도착:12:22 / 출발: 08:12 도착: 15:24
- 거리: 약 18km / 약 41km
- 경비: 24.92 Euro / 16.6 Eu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