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차 - 마지막 이야기

by 잼 매니저

18일 차 - 마지막 이야기


‘오늘로서 순례자의 길이 끝이 난다.’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약간의 떨림과 설렘이 만들어 내는 긴장 속에서 마지막으로 순례자의 길에 오를 준비를 했다. 평소와 같이 준비를 마쳤고, 언제나처럼 홀로 문밖을 나섰다.


긴장도 잠시, 길에 나선 지 1시간 정도가 되자 따사로운 햇볕 때문인지 졸음이 솔솔 몰려왔다. 졸음도 쫓고 챙겨 먹지 못 한 아침도 해결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라테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샌드위치를 입에 물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니 어느 정도 잠이 깼다.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길에 들어섰다.


길은 마지막 날이라고 해서 결코 편안하거나 쉽지 않았다. 하늘에서는 짓궂게도 비가 내렸고 길에서는 오르막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길이 마지막이라고 안일해진 나에게 끝날 때까지 결코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 산티아고 대성당이 눈앞에 보일 때까지 끝난 게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묵묵히 평소처럼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높이 솟아오른 대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순례자의 길의 마지막 도시인 'Santiago De Compostela'(이하 산티아고) 안에 들어와 있던 것이다. 마지막 도시 산티아고에서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대성당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다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느꼈던 떨림과 설렘이 만들어 내는 긴장감, 그 느낌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일반인(순례자가 아닌 도시민 혹은 관광객)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런 건 하등 신경 쓰이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종착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점점 경쾌해지는 발걸음으로 씩씩하게 그곳을 향해 나아갔다.


마침내 나는 산티아고 대성당에 앞에 섰다. 성당은 보수공사 중인지 두 개의 첨탑 끄트머리 약간을 제외하고는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당에서 느껴지는 압도감은 내게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멍하니 성당을 바라보다 보니 점점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다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18일간의 일정이 끝났다는 것이, 60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 마침내 이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머리와 온몸에 전해져 느껴지고 있었다.


좋았다. 이제부터 냄새나는 우비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비와 땀에 젖어 냄새나고 답답한 등산화를 신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무겁고 냄새나는 돌덩이 같은 배낭을 메고 하루에 몇 시간씩 외롭게 걷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침에 일어나서 창밖을 확인하고 비가 오면 한숨을 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널찍한 도미토리에서 쓸쓸하게 혼자 잠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비와 땀에 젖은 빨래 때문에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을 다시 할 수 없다는 것이 슬펐다. 미운정 들었던 무언가와 헤어지는 기분이었다. 시원하면서도 씁쓸한, 딱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벅차오름이나 격렬한 감정의 동요 혹은 공허함이나 허탈한 감정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더 이상 위에 나열한 것들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시원 씁쓸함과 무엇인가를 시작해서 무사히 끝냈다는 편안함만이 느껴졌다. 이 길을 걸은 것이 후회되지도 않았고 엄청 즐겁거나 좋지도 않았다. 잘 마무리됐다는 평화로운 일렁임. 단지 그것뿐이었다. 내가 나중에 생을 마감할 때도 이런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살아온 인생에 대한 후회 없이, 격동적인 감정의 동요 없이 평온하고 평화롭게 끝났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나의 18일에 걸친 순례자의 길은 끝이 났다.



+에필로그


산티아고 내의 어느 한 숙소에서 한국인을 만났다. 프랑스 생장에서 길을 시작하신 그분은 나와는 다른 어려움을 가지고 길을 걸으셨다고 한다. 나의 순례자의 길이 외로움과의 싸움이었다면, 그분의 순례자의 길은 사람과의 싸움이었다고. 10명이 넘는 한국인들과 몇몇의 외국인들은 길이 시작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같이 움직였다고 한다. 사람이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가 비슷하고 비수기로 인해 선택지가 거의 없는 숙소는 같은 숙소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고, 그렇게 그들은 40일 정도에 이르는 순례기간 동안 대부분 같은 숙소에서 지냈다고, 그분은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고 함께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은 좋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같이 그렇게 붙어있으니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했다고 한다. 그분과 나는 같은 시기에 순례자의 길을 걸었지만, 느끼고 깨달은 것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었다. 우리는 각자가 갖지 못 한 서로의 것을 바라며 길을 걸었다.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내가 바랐던 길도 그렇게 낭만적이고 좋지만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 위에서 보낸 3주 정도의 시간은 전체의 인생을 놓고 본다면 찰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간이 내게는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하나의 ‘삶’이었다. 그 삶에서 나는 막연했던 스스로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잊지 못 할 순간들을 맛봤다. 또, 평생 안고 살아갈 추억과 가르침을 얻었다. 극적인 무언가는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니 길을 걸을 때 만난 모든 것과 그에 대한 감정과 생각이 모두 극적이었다.


#오늘 걸은 길

- 출발: 08:10 도착: 13:47

- 거리: 약 24.9km

- 경비: 24.92Euro


Padron - Santiago de Compostela


keyword
이전 17화16, 17일 차 - 마지막 순간을 향하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