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차 - 평온에 이르다
새벽 1시. 분명 자리에 일찍 누웠으나 잠에 들지 못 해 뒤척이다가 어느 순간 잠에 든 것 같은데, 비몽사몽 눈을 떠보니 새벽 1시였다. 요 며칠 계속해서 새벽에 눈이 떠진다. 아마도 거리가 짧아 몸이 힘들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지, 추측해본다. 내일을 생각해 다시 잠에 들기 위한 노력들을 했으나 헛수고였다. 같은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코골이와 이갈이의 오케스트라는 이어폰을 뚫고 계속해서 내 신경을 건드렸다. 흡연자라면 담배를, 애주가라면 술을 한 잔 할 타이밍이지만 나는 둘 모두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거실로 나와 어스름한 창 밖 풍경을 보며 핸드폰 사진첩을 뒤적였다.
쌓인 추억들을 한장 한장 넘기며 ‘이런 때도 있었지’, ‘이 때는 정말 재밌었지’, ‘벌써 이게 1년이 넘었네’, … 이런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넘기다 보니 순례자의 길 초반에 찍었던 사진들이 나왔다. 킥보드를 샀던 날, 출발하기도 전에 가야 할 곳들을 지도에 표시 해 놓은 사진, 돌덩이 같은 가방을 메고 거울 앞에서 찍은 모습, 순례자의 길 첫날에 잤던 소방서, 안개 자욱한 흙길, 그간 먹었던 저녁식사들, 정겨운 포르투갈 시골 마을들과 길들…. 고단하고 외로웠던 시간들이 일상이 되고 어느새 그 일상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점이 다가왔다. 아직은 며칠 남았지만 이 며칠도 순식간에 지나갈 것임을 이제는 알고 있다.
요란하게 출렁이던 감정의 파도는 이제 잠잠해졌다. 앞으로 남은 길은 평온하고 잠잠할 것이다. 어떤 예상치 못 한 일들이 나를 맞이할지 모르지만, 담담하게 산티아고에 도착할 것이다. 여전히 어둑한 창밖 풍경을 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새벽 5시. 이제는 정말 자야 된다는 생각으로 자리에 다시 누웠다. 쉽지는 않았지만, 결국에는 잠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몇 시간이 지나고 눈을 떠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잠을 잔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나간 후에 조금 더 눈을 붙이고 싶었지만 이 알베르게는 퇴실 시간이 정해져 있어 일어나야만 했다.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과 멍한 정신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나서기 전 정해진 일들을 기계처럼 처리했다.
오전 8시 30분. 나에게는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알베르게의 고요함이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나서는 순례자임을 암시해주고 있었다. 문을 열고 나서자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풍경에서 비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떨어지는 빗방울은 적막함 속에서 울려 퍼지며 어둑한 세상을 적셔가고 있었다. 이 정도 비라면 내가 젖는 것도 시간문제겠다 싶어 꿉꿉한 냄새가 나는 판초우의를 꺼내 입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 한 다음 날이 으레 그렇듯, 멍한 정신과 둔감한 신체는 제대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느낌이었다. 몸은 분명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나 정신은 알베르게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비구름으로 덮인 회색빛 하늘에서 조금씩 균열이 생기며 선명하게 파란 하늘이 점점 영역을 넓혀갔고 눈부시게 빛나는 해가 천천히 온 세상을 밝게 비추기 시작했다. 이 광경은 가히 절경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현상이었다. 이를 보자, 비구름이 물러나듯이 내 머릿속 안개가 걷히며 몽롱한 상태에서 해방되었다.
스페인에서의 순례자의 길은 포르투갈의 그것과 모든 면에서 확연히 달랐다. 노란 화살표, 알베르게, 도로, 순례자 표시(조개껍데기) 등 모든 순례자의 길 관련된 것들이 잘 정립된 시스템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도로 옆에 나 있는 도보들은 어찌나 잘 되어 있는지 킥보드가 굴러가기에 아주 적합한 자재로 이루어져 있어 정말 부드럽게 나아갈 수 있었다. 심지어는 날씨조차 포르투갈처럼 변덕스럽지 않았다. 한 번 비가 그치고 나니 더 이상 비가 내리지 않았다. 바람 역시 부드럽게 불어왔다. 한 시간에 몇 번씩 비가 왔다가 그쳤다가 왔다가 그쳤다가 하지도 않았고, 갑자기 태풍 같은 바람이 불어 닥치지도 않았다.
나의 순례자의 길은 이를테면, 평온에 이르렀다.
잘 닦여진 편안한 길을 선선한 날씨에 걷는다는 것은 참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다. 하지만 15일 동안 돌덩이 같은 배낭을 메고 온갖 고생을 하며 걷기만 한 사람에게는 재미없고 지루한 일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동안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던 문제들이 불평불만이 되어 길을 걸으며 일취월장한 혼잣말로 표출되었다.
“아니 대체 갑자기 목은 왜 아픈 거지?”
“아, 안 아프던 발목이 또 아프기 시작하네 이거”
“아오 이놈의 가방은 카메라 가방을 빼도 무겁네”
………중얼중얼.
오전 11시 30분. 구시렁구시렁 혼잣말을 내뱉으며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시 간 거리가 짧아 도시 하나를 더 갈 수 있는 충분한 여유가 있었지만, 오늘은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 하여 곧장 알베르게를 찾아갔더니 오후 1시에 문을 연다는 푯말이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알베르게 바로 앞에 카페가 있었다. 그곳에서 1시까지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하고선 자리를 잡고 타파스와 맥주 한 잔을 시켰다. 타파스를 먹고 있자니 스페인으로 넘어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2년 전, 바르셀로나에서 한 달 동안 있을 때 수없이 먹었던 타파스는 스페인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향수에 젖어 있다 보니 어느새 1시가 되었다. 알베르게로 가 도장을 받고는 아무런 문제 없이 침대를 배정받았다. 침대에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나오자 어제 오케스트라를 연주했던 서양인 순례자 2명이 활짝 웃으며 반갑게 나에게 인사를 건네 왔다.
‘아, 오늘도 편히 잠자기는 글렀구나.’ 생각하고는 애써 웃음 지으며 인사하고 어제 못 잔 잠과 오늘 못 잘 잠을 보충하기 위해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 오늘 걸은 길
- 출발: 08:30 / 도착: 11:30
- 거리: 약 16km
- 경비: 19.32 Eu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