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재치 어린 문구가 현실이 되어버린 지금, 방 안에 홀로 앉아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
내 생 최초의 장례식. 내내 바라고 그려 왔던 선생님의 모습을 가진, 선생님이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렸던 한 사람의 죽음. 짧은 머리, 까무잡잡한 피부, 삐쩍 마른 몸, 거기에 하얀 뿔테 안경이 인상적이었던 사람. 학생의 인생에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크고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몸소 증명하며 살아온 남자.
환기해본다. 그 사람과 한 공간에 있을 수 있었던, 8년 전 그때를.
사회문화 수업 전 쉬는 시간, 미리 책상 위에 교과서와 유인물을 가지런히 놓고 있는 교복 차림의 내가 있다. 지난 수업 시간까지 나간 진도를 확인하고, 오늘 시작하게 될 페이지를 확인하는 중이다. 수업 종이 울리고, 곧 앞문으로 선생님이 들어온다. 학생들과 인사를 나눈 선생님은 학생들을 둘러보다 내게 시선을 멈추고는 “지난번에 어디까지 했었지?”라고 묻는다. 나는 준비해둔 대답을 자신 있게 말하고 선생님과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서로에게 비춘다. 우리 반의 사회문화 수업은 항상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것은 선생님과 내가 신뢰로 쌓아 올린 유대감이자 하나의 약속이었다. 그 보이지 않는 끈은 선생님이 교단에 서서 수업을 하고 내가 책상에 앉아 수업을 듣던, 그 시절의 우리를 분명하게 이어주고 있었다.
선생님을 떠올릴 때면 어김없이 따라오는 또렷한 기억이 하나 더 있다. 학교 밖, 여러 순대 볶음 가게가 밀집한 어느 오래된 건물 안 구석에서 철판을 두고 마주 앉아 있던 그 날의 기억.
기억 속 선명한 장면들. 순대와 함께 맥주를 주문하는 선생님과 앳되어 보이는 나를 번갈아 보며 망설이는 가게 이모에게 학교 선생님이니 걱정 말라하시던 선생님. 밥을 먹는 내내 교육 철학과 인생관에 대해 이야기하던 열정 가득한 표정.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락이 온다는 제자들과의 흥미진진한 일화들. 그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느껴졌던 자부심과 뚜렷함 그리고 아이처럼 밝았던 선생님의 얼굴. 나이와 신분, 세대를 초월하고 친구처럼 함께 방방 뛰며 놀았던 노래방까지. 그 장면들은 한 여름밤의 꿈처럼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기억으로 내 안에 남아있다.
페이스 북에서 선생님의 부고를 보기 얼마 전, 졸업 후 오랜만에 학교를 찾아갔었다. 선생님을 포함한 2명의 은사님을 찾아뵙고, 친했던 영양사 누나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때 선생님은 학교에 계시지 않았다. 뵈러 갔던 다른 은사님께선, 선생님이 원래 갖고 있던 병이 나빠져서 잠시 휴직계를 낸 뒤 쉬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때 그 사건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따로 연락도 드리지 않았다. ‘다음에 왔을 때는 계시겠지’, ‘그때 다시 뵈면 되겠지.’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장례식은 서울 근교의 내가 평생 닿은 적 없는 어느 지역의 한 작은 병원에서 치러지고 있었다. 처음 보는 동네와 낯선 길 위에서, 가라앉은 몸과 정신으로, 내키지 않는 긴장감에 불편함을 느끼며, 익숙한 이름 세 글자가 적힌 곳을 향해 갔다. 결혼을 하지 않은 선생님의 장례식은 형님 되시는 분의 가족들이 조문객을 맞고 있었다. “누구..?” “선생님 제자입니다.” “아…. 들어오세요.” 어색하고 불편한 인사를 나누고 제단 위에 놓인 선생님의 사진을 바라봤다. 믿기지 않았다. 어딘가에 분명 존재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그 사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선생님을 이제 다시는 못 본다고? 말도 안 돼.’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내 기억은 곧바로 집에 가는 길에 장례식장 앞에서 선생님의 담임 반 아이들과 마주쳤던 때로 넘어간다. 나와 선생님의 유대감을 질투했었던 그 아이들. 다 지난 일이지만, 나 역시 그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질투했었다. 단지 그 반에 배정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생님의 관심과 애정을 받는 그 아이들을.
이제 와서 돌아보면, 그 아이들과 나는 다를 것이 없었다. 좋아하는 선생님의 관심에 목말라하는 겉모습만 성장이 끝난 고등학생.
-
그리고 충격적인 두 번째 장례식. 이제 막 고등학교에 올라간 17살의 극단적인 선택. 나와 같은 체육관에 다녔던 3남매 중 둘 째였던. 까불거리고, 말도 안 듣고, 새침데기 같았던. 뭐가 그렇게 좋은지 깔깔 거리며 시끄럽게 웃던 소녀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
아파트 고층에서 뛰어내려 죽었다는 이야기. 1년도 넘게 같이 운동을 했던 그 아이가. 소설, 만화,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에서. 대체 어떻게….
관장님의 전화를 받고 갔던 장례식에서 보았던 남겨진 두 남매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두 얼굴 외에는 기억할 수가 없다. 그 아이의 얼굴을 보고 절은 했는지, 자리에 앉아 밥은 먹었는지, 그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었는지, 그 어느 것도 떠올릴 수가 없다.
가족들 간의 사이가 좋지 않아 기댈 곳이 많지 않다는 것은 얼핏 알고 있었는데. 그나마 기댈 수 있던 언니가 대학생이 되고는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들다는 것을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었는데.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리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대충은 눈치채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나도 내 삶이 있고 대학생활에 적응하느라 바빴으니까. 그런 핑계들로 그 아이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메시지 하나, 밥 한 그릇 전해주지 않았다.
-
인생에서 가장 부끄러운 기억 중 하나. 4학년 진학을 앞두고 학군단 동기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학군단에도, 동기들에게도 마음이 가지 않았던 나는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 3학년의 진급식과 4학년의 임관을 축하하는 행사에서 아버지를 여읜 그 동기가 인순이의 아버지를 불렀다. 나는 ‘노래 진짜 못 하네.’라고 생각했고, 그걸 입 밖으로 꺼냈다. 옆에 있던 다른 한 동기는 진심이냐고 물었고 나는 진심이라고 답했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학과 졸업 작품을 끝내고 학과 동기들과 마지막 술자리를 가졌다. 새벽 4시, 동기 둘과 나 하나만이 남아있었다. 꽤나 취해있던 우리는 속에 있던 이야기를 하나 둘 풀어놓고 있었고, 어느새 나는 가족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당시 가족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던 나는 불만족스러운 말투로 투덜거렸고, 동기 둘은 나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주었다. 그리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우리 아버지는 분명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거든? 근데 있잖아, 그런 아버지라도 없으니까. 없으니까 너무 보고 싶더라고. 내가 너무 힘드니까, 기댈 곳이 없으니까. 살아있을 때 그렇게 원망했던 아버지인데도 너무 그리운 거야.”
당시 그 친구는 자신의 삶을 살고 있지 못 했다. 어머니는 몸이 좋지 않으셨고 동생은 너무 어렸다.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는데,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 친구 외에는. 나는 그걸 알고 있었음에도 그 친구 앞에서 반찬 투정하듯 가족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것이다. 갑자기 부끄러움이 솟았다.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친구는 덧붙여서 말했다. “있을 때 잘해라.” 분명 많이 들어 보고, 보아 왔던 진부한 말인데 그 말이 나를 짓눌렀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은 그 옆의 다른 동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2019년 11월 24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
죽음. 죽음을 생각한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미래를 고민하고, 현재를 내려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