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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 매니저 Oct 24. 2020

아웃렛

 꽤나 오랜만에 옷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드라이브 겸 교외에 있는 아웃렛으로 향했습니다. 도로 위로 떨어지는 낙엽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가을이지만, 10월의 바람은 참으로 기분 좋게 시원했습니다. 공휴일 점심때라 그런지 많은 차들이 주차를 하기 위해 줄을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덕분에 꽤나 시간을 잡아먹고 나서야 아웃렛을 둘러볼 수 있었죠. 아웃렛 안에도 사람은 바글바글 했습니다. 도심보다 가격이 그렇게 싸지도 않은, 서울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이 많은 사람들이 쇼핑을 하러 왔다는 것이 저는 조금 의아했습니다. 한국의 아웃렛은 그 본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합리적인 소비를 위한 공간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곧,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도 청명한 가을 하늘의 부름에 이끌려 겸사겸사 이곳에 왔다는 것을요.

 하여간,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생각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한 SPA 브랜드에 들어갔습니다. 아웃렛 속 SPA 브랜드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혹시 엄청나게 가격이 저렴한 건 아닐까?’라는 기대감에 열심히 둘러보았죠. 가격은 실망스럽게도 집 근처 매장과 별반 다를 바 없었지만, 아무 때나 편하게 입을 수 있을 것 같은 검은색 바지 하나와 이번 겨울 내내 뽕을 뽑을 수 있을 것 같은 검은색 목폴라 하나가 눈에 띄어 집어 들었습니다. 어디 한 번 입어볼까, 하며 피팅룸을 찾아 차례를 기다리는데 웬걸, 손님이 들고 들어갈 옷의 개수가 표시된 숫자판을 나눠주는 직원이 너무 제 타입인 것 아니겠습니까? 아담한 키에 귀여운 외모, 본인의 장점을 잘 살린 스타일까지! 그녀는 분명 그 공간에 있던 사람들 중 가장 매력적인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제 차례가 왔기에 저는 2벌이요, 하고 그녀가 건네는 숫자 2가 커다랗게 적힌 숫자판을 받아 들고 피팅룸에 들어갔습니다. 옷을 입어보며 저와 꽤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이대로 문밖을 나가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저기, 제가 혼자 와서 그런데 혹시 어떤지 좀 봐주실 수 있나요? 괜찮나요?”라며 말을 걸어볼까 싶었지만 차마 실제로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머리로 아무리 상황과 대사를 그려놔도 그걸 실천할 뻔뻔함이 제겐 없으니까요. 그리하여 현실성 없는, 콩닥거리는 상상은 잠시 제쳐두고 앞뒤, 옆모습을 거울로 꼼꼼히 체크해봤습니다. 옷의 디자인은 마음에 쏙 들었으나 핏이 애매해 다른 사이즈도 입어보고 결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옷을 갈아입고 피팅룸을 나서 직원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때마침 아까 전의 그녀가 눈에 띄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짐짓 태연한 척 그녀에게 다가가 L사이즈의 목폴라와 M사이즈의 바지가 있는 지를 물었습니다. 그녀는 사람 좋게 웃으며 (아, 저는 여기서 다시 한번 그녀가 이곳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제 옷을 건네받고 손바닥 크기의 기기를 꺼냈습니다.

 어라, 잠깐. 가만 보니 기기로 바코드를 찍는 그녀의 손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순간 저는, ‘손을 떤다. 말을 걸었는데 그녀가 손을 떤다. 이 공간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 내가 말을 걸었을 때 눈에 보일 정도로 손을 떤다. 이거 혹시 어쩌면…? 나? 나 때문인가?’와 같은 희망이 깃든 일련의 추측(혹은 억측)을 저도 모르게 해 버렸습니다. 이런 류의 달콤한 희망 회로는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혼자 만의 몽상에 빠져있는 사이 그녀는 어느새 검색을 마쳤는지 난처한 표정으로 “죄송하지만 말씀하신 제품의 사이즈 재고가 없네요.” 하고 제게 말했고, 저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그냥 이 사이즈로 사야겠네요.”라고 답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짧은 대화는 끝이 났고 저는 들고 있는 옷들을 결제하기 위해 계산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계산을 하기 위해 줄을 기다리고 직원이 계산을 도와주는 동안에도 제 머릿속에는 온통 그녀가 손을 떠는 장면과 그에 대한 상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지극히 사사롭고 때론 아주 황당무계한, 그런 종류의 생각들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계산이 끝나 그곳에 머무를 명분이 사라졌습니다. 으레 물건의 계산을 마치면 상점을 나서야 하는 법이니까요. 해서 저도 쇼핑백을 받아 들고는 출입문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슬슬 배가 고파와 3층에 위치한 푸드코트를 향하면서도 그녀를 떠올리는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밥을 먹고 다시 그곳에 가서 말을 건네 볼까? 먼저, 아무래도 계속 생각이 나서…, 로 물꼬를 튼 다음 혹시 괜찮으시다면 번호를 받을 수 있을까요?, 라고 묻는 거야. 만에 하나 그녀의 손 떨림이 정말 나 때문이었다면 그녀는 내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11개의 숫자를 알려주겠지. 그럼 우리는 연락을 주고받게 될 테고, 몇 번의 만남이 있은 후 우리는…

 허나 상상이 현실이 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상상과는 다른 현실적인 어려움을 쉽게 그려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까요? 예컨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애써 어색함을 감추며 알아가기 위해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고, 교외에서 일을 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오고 가는 일들의 고됨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갑자기 모든 것이 귀찮아져 버렸습니다. 대체 언제부터 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알아가는 시간들을 설레는 일이 아닌 귀찮은 일로 치부하게 되어버린 걸까요.

 그리하여 저는 결국 ‘밥이나 먹고 집에나 가자’하는 생각으로 점심도 저녁도 아닌 식사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차를 향했습니다. SPA 브랜드 이름이 커다랗게 쓰인 종이 백을 기분 좋게 앞뒤로 흔들면서 말이죠. 자유로를 거슬러 올라 집에 가는 길, ‘아무래도 역시 말을 걸어봤어야 하나’ 란 미련이 자꾸 머리를 맴돌기에 창문을 모두 내렸습니다. 가을 향이 잔뜩 밴 바람이 떠오르는 잡념들을 훌훌 날려버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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