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황순원을 보고 왔다.
오늘도 문학촌 기행을 나섰다. 이번이 여섯 번째 기행이다. 이번 목적지는 우리에게 “소나기”로 잘 알려진 황순원 문학관이다. 황순원은 70여 년에 걸친 작가 경력과 오랜 교육 경력을 통해 많은 문학인을 길러냈다. 또한 국내 주요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우수한 신예작가를 발굴해서 배출하였다.
황순원은 원고가 활자화될 때까지 자신만의 맞춤법과 띄어쓰기 기준으로 직접 교정을 보는 작가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작품에 대한 애정이자 또한 독자에게 내용을 명확히 전달하게 하는 작가의 의무라고 말했다. 이러한 습관에서 빚어진 간결하고 세련된 문체, 군더더기 없는 구성과 훈기 있는 여운 등은 우리의 전통적 산문 문학에서 낯선 요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은 오히려 우리 전통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느낌을 강력하게 촉발한다.
황순원은 일제 치하에서 침묵을 지키면서도 읽히지도 출간되지도 않는 작품을 은밀하게 쓰면서 모국어를 지켰으며, 일생의 작품을 통해 인간의 정신적 아름다움과 순수성, 고귀함과 존엄성을 존중해 왔다.
작품을 구상해서 집필하는 단계에서 황순원은 항상 “작품다운 작품을 쓰지 못할 바에는 오히려 안 쓰는 편이 낫다는 작가적 양심이 그저 쓰고 싶다는 욕심 앞에 무릎을 꿇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작가의 의식은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한다, 무의식의 세계를 그릴 때에도 작가는 그걸 분명히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라고 언급했을 정도로 작품의 완벽성을 추구하였다. 이는 대패질을 하는 시간보다 대팻날을 가는 시간이 길다는 말처럼 작품의 구상 단계에서부터 신중을 기했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번 문학관 기행을 계기로 황순원이 소설가임과 동시에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황순원은 1931년 시 <나의 꿈>을 [동광]에 발표한 후 시 창작을 계속하여 [방가](1934년), [골통품](1936년) 등 두 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이후 1937년부터는 소설 창작을 시작하여 시 104편, 단편소설 104편, 중편소설 1편, 장편소설 7편의 왕성한 저술 활동을 이어 나갔다. 여기에서는 황순원의 시를 몇 편 소개해 보겠다.
밀어
내 가슴속은 묘지
묘지기는 나
내게 한끝 줄을 남기고 간 이들을
나는 내 가슴속 묘지 안에
부활시켜 놓는다
나는 죽음에 대한 얘기가 듣고 싶은데
그들은 자꾸 어떻게 사느냐는 얘기만 한다
늙는다는 것
내 나이 또래 환갑은 됐음직한 석류나무 한 그루를 이른 봄에 사다 뜨락 볕바른 자리를 가려 심었다. 그해엔 잎만 돋치고 이듬해엔 꽃을 몇 송이 피웠다 지워 다음해엔 열매까지 맺어 뻥끗이 벙으는 모습도 볼 수 있으리라 기대가 컸다. 헌데 열매는커녕 꽃조차 피우지 않아 혹시 기가 허한 탓인가 싶어 좋다는 거름을 구해다 넣어줬건만 그 다음해에도 한뽄새였다. 어쩌다 다된 나무를 들여온 게 한동안 안쓰럽더니 차츰 나무 대하는 마음이 허심하게 되어갔다. 이렇게 이 해도 열매 없는 가을을 보내고 겨울로 들어서면서였다. 짚과 새끼로 늙은 나무가 추위에 얼지 않게끔 싸매주고 물러나는데 거기 줄기도 가지도 뵈지 않는 자리에 석류가 알알이 달려 쫙쫙 벙을고 있었다.
해바라기
땅의
해에는
흑점이
더 많다.
호박
비 맞는
마른 덩굴에
늙은 마을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