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몰랐던 수주의 세계를 찾았다.
한동안 시도 못 쓰고, 소설도 못 쓰고, 문학관도 다니지 못하고, 아무튼 좀 심사가 복잡한 일이 있었는데, 어제는 집에서 가까운 수주문학관에 다녀왔다. 우리에게는 ‘논개’라는 시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상 수주는 단 한 권의 시집만 남겼다. [조선의 마음]에는 우리가 잘 아는 ‘논개’를 비롯하여 ‘봄비’, ‘생시에 못 뵈올 님을’ 등 28편의 시와 8편의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수주는 지금의 부천시 고강동 일대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밀양 변氏 변정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변계량의 18대손이다. 형제 중 영만, 영태와 함께 부천의 삼변(三卞)으로 불리며 학자, 문인 교수 법률가 등으로 활동하였다. 흔히 우리는 ‘논개’라는 시 덕분에 시인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수주는 시인보다는 수필가, 영문학자, 기자, 대학교수로 이름이 높았다. 특히 외국 유학을 거치지 않은 순수 국내 영문학자로 [폐허], [개벽], [신천지]와 같은 잡지에 다수의 서양 작품을 번역하여 제재하였고, 1921년부터 1930년까지의 기간 동안 스위스 여성작가인 라게를뢰프로부터 시작하여 발자크, 스티븐슨, 셰익스피어, 시먼스, 메이스필드 등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였다. 이처럼 외국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뿐 아니라, 해방 이후에는 한국 문학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조선시대 시조를 영어로 번역하여 외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고 1919년 독립선언서의 영문판 역시 수주가 번역하여 타이핑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한국의 문학과 실상을 해외에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수주를 둘러싼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근대 미술 평론을 열다. [동양화론]
수주는 1920년 동아일보에 [동양화론]을 발표하면서 근대 미술평론의 효시로 평가받는 평론가이기도 했다. 이 글에서 수주는 당시 조선의 그림이 옛것만을 고집한 나머지 현실의 생생함을 포착하지 못하고, 형식에서도 서양화에 비하여 한참 뒤떨어졌다고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불온서적으로 압수당한 시집 “조선의 마음”]
1924년 출간된 “조선의 마음”은 3.1 운동의 실패 이후 좌절에 빠지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조선 남녀에게 수주가 바치는 위로의 노래였다. 수주는 김소월, 한용운과 함께 1920년대 ‘님’을 노래한 대표적 시인이었는데, 이러한 ‘님’은 독자들에게 잃어버린 조국을 상기시켰기에, 조선총독부의 검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조선의 마음”은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판매가 금지되면서 압수조치를 당하게 되었다.
[신성모욕 사건] 1955년 수주는 한국일보에 연재 중인 천자춘추 코너에서 [불혹과 부동심]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위대한 위선자인 공자와 절세의 선동가인 맹자를 풍자적인 방법으로 다루었다는 이유로 유학이 건학이념인 성균관 대학교 교수직에서 파면된다. 본래 이 글은 성현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시류와 세파에 정체되고 안정된 삶만을 쫓는 부박한 세태를 풍자한 것이었으나 학교 당국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의로운 문인으로서의 수주의 일생은 문학관을 찾기 전까지 거의 알지 못했다. 그저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 강하다”로 시작하는 '논개'라는 시를 통해서 이름만 나의 뇌리에 남아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문학관에서 접한 수주는 그런 시인의 모습만으로 그리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은 인물이었다. 특히 일제 치하와 육이오 전쟁을 모두 겪으면서 조국의 젊은이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기울인 노력은 그 어떤 말로도 치하할 수 없는 위대한 행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상세한 내용은 수주의 일생에 대해서 각자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기를 권하면서, 이곳에서는 수주의 시를 한 편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홀로 뜬 별
바람도 구름도
제란듯 기승 피던 불볕도
아라비아 隊商[대상]같이
온데 간데 자취 감추고
머얼리 눈이 마지는 그 곳-
티 한점 없는 고요한 물빛 하늘과
금 근듯 또렷한 山[산]과 山[산]의 등성이 사니
헤스퍼의 고운 띠인 듯 橙色[등색]놀 그 우로
동무도 없이 홀로 뜬 외로운 별!
무에라 기리우랴-그의 端雅[단아]를
무엇에 견주우랴-그의 潔白[결백]을
말 없이, 아니 말을 잊고 바라보니
이렇다 할 슬픔, 괴롬도 없건만
눈과 마음이 함께 우네-소리도 없이!
한국시인전집, 1955년 수록
[작품해설]
바람 불고 구름 이는 궂은 날씨와, 한여름 무섭게 내리쬐는 불볕 더위는 수주가 평생에 걸쳐 경험하였던 민족현실과 생의 투영물이다. 그는 세상의 불의를 걱정할지언정 그 불의에 타협하는 것에는 한사코 저항하였기 때문에 끝내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해 질 무렵 “동무도 없이 홀로 뜬 외로운 별!”이라는 연탄 속에서 수주의 고독을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