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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May 13. 2023

홍사용 문학관을 다녀오다

노작 홍사용 문학관에 다녀왔다. 

    

기형도 문학관을 시작으로 해서 이번이 문학관 기행 다섯 번째다. 사실 이전에는 문학관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다. 물론 내가 글을 쓰기 이전이었으므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왠지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점점 문학관 순례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우리가 시인이든 소설가든 문인들을 책을 통해 접하는 것과 문학관을 통해서 접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작품을 접해도 책으로 접하는 것보다는 전시물을 통해 접하는 것이 솔직히 뇌리에 깊이 자리하게 된다.      


노작은 1900년생으로 1947년 별세할 때까지 다수의 시와 수필, 그리고 희곡, 소설 등 여러 방면의 창작활동을 이어왔으나 오히려 그런 그의 이미지가 어느 한 가지에 머물지 못한 탓에 순수 문예 동인지였던 <백조> 창간의 중추적 인물이었던 박종화, 현진건, 박영희에 비해서 낮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대부분 낭만주의 시인이 외국 풍조에 휩쓸릴 때, 그는 민중의식이 스민 민요에 관심을 갖고 민족적 서정성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형상화한, 흔치 않은 시인이었다. <백조>는 비록 3회를 끝으로 단명한 문예지이지만 한국 낭만주의 문학을 초기에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노작의 대표적인 시로 알고 있는 <나는 왕이로소이다>도 3호지에 수록된 작품이다.      


노작은 30세 무렵부터 5년간 전국 곳곳을 방랑하는 생활을 하다가 그 후 세검정 부근에서 생계유지를 위해 한의사로 일하기도 했다. 1941년 일제의 강요로 희곡 <김옥균전>을 쓰다가 붓을 꺾었고, 해방 후에는 <근국청년단>을 조직하여 청년운동을 일으키려 했으나 지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7년 1월 현, 화성시 동탄면에서 별세했다. 항일 시인으로 분류되는 이육사, 윤동주, 이상화 등을 제외하면 일제 강점기 후반에 대부분이라고 할 만큼 많은 시인이 친일 작품을 남기게 되는데, 노작은 이 시기에도 친일 시를 창작하거나 친일 활동을 하지 않은 시인 중 한 명이다. 

     

너무도 잘 알려진 <나는 왕이로소이다> 이외의 시를 한 편 소개하겠다.     


      




붉은 시름 – 민요 한 묶음 3     


이슬비에 피었소 마음 고와도 찔레꽃

이 몸이 사위어져서 검부사리 될지라도

꽃은 아니 되올 것이 이것도 꽃이런가

눈물 속에 피고 지니 피나 지나 시름이라

미친 바람 봄 투세하고 심술피지 말어도

봄꽃도 여러 가지 우는 꽃도 꽃이려니   

  

궂은 비에 피었소 피기 전에도 진달래

이 몸이 시어 져서 떡가랑잎 될지라도

꽃은 아니 되올 것이 이것도 꽃이런가

새나 꽃은 두견이니 우나 피나 핏빛이라

새벽 반달 누구 설움에 저리 몹시 여위었노

봄꽃도 여러 가지 보라꽃도 꽃이려니    

 

아지랑이 애졸여 가냘피 떠는 긴 한숨

봄볕이 다 녹여도 못다 녹일 나의 시름

불행 다시 꽃 되거든 가시 센 꽃 되오리

피도 말고 지도 말아 피도 지도 않았다가

호랑나비 너울대거든 가시 찔러 쫓으리

봄꽃도 여러 가지 가시꽃도 꽃이려니     



[삼천리문학] 1호(1938년 1월)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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