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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May 30. 2023

초여름의 기억

그녀는 늘 혼자였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의 눈에 띄는 순간만큼은 항상 혼자였다. 그렇다고 그가 그녀의 일상을 고스란히 뒤쫓는 것도 아닌 바에는 더 이상 그녀에 대해서 자세히 알 길은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우연히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제대한 후 곧바로 복학하지 못하고 휴학했던 바람에, 나중에 복학했을 때는 강의실에 아는 학생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도 강의실과 도서관만 왕복하는 처지였는데, 그런 그의 행동반경 안에 그녀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외모에만 먼저 눈이 갔었다. 긴 생머리카락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균형 잡히고 늘씬한 체형에 눈이 머물렀다. 인문관 앞 잔디에는 학생들이 서너 명씩 둘러앉아 시간을 즐기고 있었고, 나무는 한창 물이 오른 채 새잎을 토해내고 있었다. 좀 늦긴 했어도 아직은 봄기운이 가시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 그의 눈에도 보였다.

      

그녀도 가끔 잔디 위에 앉아있기는 했지만, 이상하리만치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가 보다 했지만, 그런 모습을 자주 목격할수록 그녀에 관해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학년은 어떻게 될까? 전공은 무엇일까? 왜 친구가 한 명도 없는 것일까? 궁금증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지만, 특별히 친한 친구나 후배가 없던 그는 누구에게든 물어볼 곳이 없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강의실에서는커녕 건물 안 복도에서도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지간하면 수강 신청 과목이 달라도 강의동 안에서 마주칠 법도 한데, 한 학기가 거의 끝나갈 때까지 그녀를 강의동 안에서 볼 수 없었다. 마치 그녀는 강의를 전혀 수강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그는 점점 더 궁금증이 생겼다. 혹시 그가 다니는 학교의 학생이 아닌데도 그냥 교정을 맴도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설명되지 않는 가정이었다.

     

결국 그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한창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초여름, 그날도 그는 혼자 잔디에 앉아있는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를 의식하지 않은 채, 잔디 건너편에 있는 공학관 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왠지 초점을 잃은 듯 보였다. 무엇인지 모를 우수에 젖은 듯한 그녀의 눈에는 보일 듯 말 듯 한 촉촉함이 감돌고 있었다.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라는 그의 말에, 그녀는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살며시 웃으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괜찮다면 잠시 그녀 옆에 앉아도 되겠냐고 물었고, 그녀는 그러라고 했다. 정작 그녀 옆에 앉은 그는 말문을 잃었다. 무슨 말이든지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말을 먼저 건 쪽은 그였지만, 말을 이어간 쪽은 그녀였다. 자기는 입학하자마자 몸이 아파서 휴학했다가 복학해 보니 동기들은 이미 졸업한 지 한참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항상 혼자 다닌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그녀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니, 그녀가 휴학한 기간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그보다는 훨씬 어리게 보였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이제 막 입학한 신입생 정도로 보일 것도 같았다. 그녀의 말을 들은 그도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고, 두 사람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같은 학과 학우처럼 점점 대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시 후, 그녀는 이제 가야 할 시간이라며 그에게 알게 되어 즐거웠다는 인사를 하고 교문 쪽으로 발길을 돌렸고, 그도 그녀에게 인사를 한 후 도서관으로 향했다.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그녀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도서관으로 향하던 그는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학교 안에서 특별하게 함께 다니는 학생도 없던 처지인지라 앞으로 그녀와 가끔 이야기를 나누며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날 이후 그와 그녀는 잔디밭에서 종종 만났다.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한 곳에만 앉아서 매번 공학관 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그가 다가가면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야 할 시간이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무더위가 시작될 무렵부터 그녀를 볼 수 없었고, 그러던 차에 뜻밖의 장소에서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교내 시위가 일상이던 시절의 오래된 사진 자료 중 공학관에서 추락사한 여학생을 추모하는 현수막 안에서 그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렇게 그해 초여름은 그의 기억 속에서만 남았다.     



이 글은 단행본으로 출간한 "초여름의 기억"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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