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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Oct 06. 2023

"계절의 오행"을 읽고.

정연진 작가의 산문집 "계절의 오행"을 소개한다.

정말 예상치도 못했던 일을 기회로 내 손에 들어온 서적이 한 권 있었다. 이곳 브런치에서 함께 공감을 나누던 정연진 작가의 두 번째 출간작으로, 브런치에 연재했던 일기와, 짧은 글 모음인 ‘계절의 오행’, ‘격리 시절’ 중에서 일부를 모아 엮은 책이다. 작가는 3년 전, 캘리포니아의 소도시 왓슨빌에서 지낸 시간 동안도 틈틈이 일기처럼 글을 썼었고, 그 글이 출간되면서 ‘왓슨빌 작가’가 되어 있었다. 이번 책에도 그런 일기 같은 글이 많이 실려 있다.

      

작가로부터 우편물을 보내겠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 이틀 후에 내 손에 책이 쥐어졌다. 우선 책의 크기가 마음에 들었다. 두께는 약간 두껍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크기가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터에 아무 곳에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신경을 쓴 흔적이 보여서 독자를 배려하는 작가의 세심함을 엿볼 수 있었다. 더군다나 글자의 크기까지 일반적인 소설책에서 볼 수 있듯이 나이가 좀 든 독자의 경우에는 눈을 찡그리며 읽어야 할 정도로 작은 것이 아니라 한두 포인트 정도 키운 덕분에 아주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이런 점들이 출간을 염두에 두었을 때부터 작가가 이 책에 실은 글들에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책은 엄밀하게 분류하자면, 그냥 편하게 접할 수 있는 문체의 일상 산문 정도라고 할 수 있기에, 아마도 더 독자의 구독 편의성을 높이려고 했던 것 같았다.

    

책의 내용은 크게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에서 말한 ‘격리 시절’과 책의 제목과 같은 ‘계절의 오행’, 그리고 ‘캐논까지 느릿느릿’이라는 장이다. 작가는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서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불가피한 자발적 침체기를 보내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격리 시절’에는 그 시기 동안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썼던 일기 같기도 하고 독백 같기도 한 글들을 모아놓았다.

      

‘계절의 오행’ 역시 작가는 일기라고 하고 있다. 계절이 오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기록한 일기, ‘격리 시절’에 비해서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웃이나 주변과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계절은 나에게 ‘9월’이 아니라 ‘11월’의 이미지이다.”처럼 작가가 느끼는 계절의 이미지를 작가만의 일상에서 겪었던 다양한 글을 통해서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유독 TV 드라마 프로그램 관련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한다. 작가에게는 아마도 혼자 생활한 시간, ‘격리 기간’을 포함한 그 시기가 자신의 내면을 되돌아보는 시기였음과 동시에, 다른 방법에 비해 TV 드라마를 통해서 새로운 시각을 배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거의 드라마 평론가 뺨치는 프로그램 분석과 평가 능력을 보여준다. 물론 작가의 말로, 작가는 드라마 관련 공부를 한 적은 없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연구자’인 까닭에 세상의 다양한 사물이나 현상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에 편한 글을 쓰는 필력이 더해져서 이 책에 실린 것과 같은 글이 탄생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캐논까지 느릿느릿’은 음악과 관련한 이야기 모음이다. 작가는 <캐논 변주곡>을 멋지게 연주해 보고 싶어 한다. 스물여섯부터 시작한 피아노 연주는 아직도 진행형이고,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 글들은 사실 일기는 아니다. 말하자면 단순한 도전기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도전기를 통해서 작가는 꾸준함과 끈기를 배운다. “계속되어야 하는 일, 하루하루의 연습이 쌓여야 멋진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일은 그것이 혹여 아주 작은 단계라 하더라도 귀한 시도이다. 꾸준함은 인생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것만 같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꾸준한 피아노 연습을 통해서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기록해 나가고 있었다.

     

작가의 말대로 자신은 글쓰기에 있어서는 아마추어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지만, 작가는 자신을 그렇게 평하고 있다. 하긴 문장의 곳곳에 아주 매끄럽지 못한 부분은 솔직히 눈에 띈다. 하지만 그런 필체가 글이 갖는 가치를 전혀 깎아 먹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작가의 글은 진솔하다. 작가는 하루의 일상이 갖는 가치에 대해 “하물며 버리다시피 둔 선인장도 매일매일의 루틴을 견디고 바람을 견뎌 꽃을 피워 내기도 하는데, 그동안 마무리하지 못하고 포기해 버린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든지, “그때 기록하지 않은 것은 시간이 지나고 공간이 바뀌는 한 그때 그 순간과는 다른 의미이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으로 기록의 소중함을 실감하며, 이 글을 썼다. 나는 이런 작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나 개인의 감성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조금이라도 작가와 비슷한 시기를 겪어본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만큼 작가의 글이 갖고 있는 ‘편안한 몰입력’의 수준은 보통의 레벨을 훌쩍 뛰어넘는다.

    

“기록을 며칠 하다 보면 느끼게 된다. 아. 내가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그때는 생생했던 대화와 기억이 조금씩 생각나지 않게 되는구나. 몇 년 전의 일도 가물가물하구나. 그때 느꼈던 감정이 그 끝만 남아 있고 과정은 다 잊어버리는 것인가 보다...” 작가는 글을, 일기를 쓰면서, 독백한다. 자신이 일기를 쓰는 이유는 단순하다.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저 모든 사람이 제 할 일을 하고 있듯이, 바람이 불어도 불지 않아도 그저 제 할 일을 하고 있듯이 글을 쓰고 기록을 남기면 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는다. 그래서 작가의 일기가 편한 글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마음을 먹는 일’에 하여 실천적 사고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글을 쓰면서, 혹은 다른 일상 중에서 “마음을 먹는 일, 그것은 사실 소로(Thoreau)가 말했듯이, 단 한순간, 1초면 충분했다.”는 작가의 말은 오히려 “마음을 먹는 일”에 대한 신중함의 역설적인 표현이었다. 수록된 글 자체가 일상 산문인 까닭에 의도적인 어떤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의도를 지닌 글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끝없이 확인하고 또 다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더 많다. 글을 읽다 보면 왜 작가가 이런 류의 일기 작성을 즐기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처한 환경이나 여건에 따라 수많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 작가는 그런 생각 중에서 진실로 자신의 남은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지표가 될 만한 이야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끊임없이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작가의 일기는 이 책의 출간과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기를 쓰는 행위는 시작은 알고 있었어도 끝을 모르는 일련의 연속적인 행위이다. 일기 작성을 통해서 앞으로도 작가의 인생에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다. 모처럼 편안하고 푸근한 글을 접하게 해 준 정연진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고, 이런 기분을 여러 독자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이 글을 적는다.  


        

정이흔 (브런치 작가)



이 글은 단행본으로 출간된 [글쓰기가 두려운 사람은 책을 읽지 마라]에 수록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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