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진 작가의 세 번째 책이 도착했다.
‘왓슨빌’과 ‘계절의 오행’에 이은 정연진 작가의 세 번째 출간작인 ‘우비 순트, 삶의 방향타를 잃고’가 내 손에 들어왔다. 나는 작가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브런치스토리에서 서로 공감하며 이야기를 나눈 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이 책의 첫 장을 넘기며 받았던 느낌은 작가가 보통의 다른 작가들처럼 일상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으면서도 결코 자기만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을 독자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느낌은 지극히 나만의 주관적인 느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도 우리 모두처럼 어찌 보면 암울하다고 할 수 있는 동시대(작가 개인적인 환경은 물론, 코로나 시국이라는 전 세계적인 단절과 고립의 시대를 말한다.)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도 쉽게 작가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비 순트(Ubi Sunt)’는 라틴어 ‘우리 앞에 있던 그들은 어디에 있나(Ubi sunt qui ante nos fuerunt)’의 앞부분에서 따온 말인데, 덧없이 사라진 과거에 대한 회한을 의미한다. 작가는 지난 2023년에 가족과 친구, 스승을 잃은 데서 온 상실감에 따른 회한 속에서 어두운 날들을 보냈다. 많은 사람이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각자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날을 살아가지만, 어느 시기에 가서 지나온 날을 되돌아보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쓸쓸한 회한에 잠길 경우가 많다. 작가 역시 힘겨운 유학 생활과 지금의 생황 속에서 어쩌다 보니 곁에 영원히 있을 것만 같았던 존재들을 잃었고, 그들의 죽음이 가져다준 존재의 진정한 가치에 대하여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음을 이 책을 통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책에 실린 30여 편의 글 중에 상당 부분은 브런치스토리에서도 이미 읽었던 부분이기에, 책을 받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끝까지 정독할 수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일상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 글들임에도, 글이 담고 있는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바로 작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의 이야기라는 점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이야기들이다.
작가와 가족, 작가와 친구, 작가와 은사, 작가와 동료, 심지어 작가와 셋방을 계약한 집주인과 공인중개사 등 수없이 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그 사람들은 모두 작가에게 어떤 의미로든 중요한 역할을 제공하고 있었지만, 그런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작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을 모두 다 품고 가기에는 너무 벅찬 인생이었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작가가 전공을 선택했던 과정과 학문을 지속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지난 많은 시간, 그렇지만 작가의 주관적 기준에서 바라본 끝없는 연구의 갈망, 그럼에도 특별하게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존감이 저하된 자신의 처지가 과연 지금까지 자신이 잘, 제대로 살아왔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했다. 하지만, 작가가 인용한 “실패했다고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야”라는 TV 드라마 속 대사에서처럼, 작가도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라는 자기변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작가의 마음은 작가가 말해주지 않아도 책을 다 읽을 때쯤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다양한 사람과의 관계 중에서 근래에 들어 가장 소중하다고 느끼는 인연은 아마도 브런치스토리에서 만난 인연인 것 같았다. 일부 인연은 일부러 글의 한 꼭지를 할애해서까지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을 보면 작가가 사람과의 인연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작가들과의 인연은 이전에 작가를 둘러싸고 있던 인연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작가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 주는 인연들이다. 작가는 그런 새로운 인연 덕분에 지난 인연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작가가 지난 인연들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새롭게 맞이한 인연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도와주고 있었고, 그런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이 글의 곳곳에 녹아있음을 보게 된다.
작가는 자신이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결코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읽기에는 이미 노련한 글쟁이의 단계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단어의 연결만으로 문장이 완성되고, 그런 문장이 모여서 한 편의 글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누구나 작가라고 칭할 수 있다. 그런 작가 중에서 정연진 작가는 특히 글에 자기의 마음을 싣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는 흔치 않은 작가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한 문장을 읽더라도, 시각적으로 보이는 글자가 의미하는 것 이상의 작가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연진 작가의 글은 그래서 이상하다. 무슨 양념을 친 것도 아닌데 맛깔나고, 화려한 옷을 입은 것도 아닌데도 아름답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포근한 이불속처럼 마음이 편해지는 마법이 있다.
책을 소개하면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일은 그 글을 읽고 책의 저자인 작가를 섣부르게 평가할지도 모르는 독자의 우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정연진 작가의 글을 소개하면서 조금은 신중해지고 싶다. 나에게 깊이 감명을 준 글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독자의 눈에는 차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급적 이 책을 읽으시는 분은 이전에 저술된 작가의 책도 접해보는 것이 작가의 문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팁까지만 드리고 싶다.
휴일 아침에 오랜만에 글을 써 보았다.
이 글은 단행본으로 출간된 [글쓰기가 두려운 사람은 책을 읽지 마라]에 수록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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