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풀잎에 맺힌 이슬
도르르 구를 때면
발아래는 달팽이 천국
복족류¹의 본성은
감당하기 힘든 집을 짊어지고
묵묵히 기어 다닌다
어쩌다 눈에 띄는 민달팽이는
수억 년을 안고 살아온 설움을
고스란히 후대로 넘긴다
달팽이 세상에는 없는 이삿짐센터
하나씩 짊어진 집들은
민달팽이를 위한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갈려 있는
유주택과 무주택
달팽이보다 못한 인간이
달팽이를 밟는다
까짓 집쯤은 부서져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냥 실수였을 뿐
밟히는 줄도 몰랐다는 변명만
창졸간에 민달팽이가 되어 버린
유주택자의 귀에 공허함으로 남았다
그저,
옮겨달라는 부탁은
일절 한 적 없다는 말만
입 안에서 우물거릴 뿐이다
내뱉을 힘이 없어서이다
복족류¹ 배가 발인 무리를 일컬음. 대표적인 무리에는 달팽이와 민달팽이가 있다.
첫번째 시집 <흩뿌린 먹물의 농담 닮은 무채의 강물이 흐른다>에 실린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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