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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May 21. 2024

<당신의 신>

김숨 소설집 <당신의 신>을 읽었다.

김숨의 소설집 <당신의 신>에는 이혼, 읍산요금소, 새의 장례식 3편의 단편소설이 실려있다. 김숨은 1974년 울산에서 태어났으며, 대전일보 신춘문예와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백치들> 외에 다수의 장편 소설과 <투견>, <간과 쓸개> 등의 소설집을 출간했고,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한 작가이다.

     

한 달이라는 이혼 숙려 기간을 보내고 법원 대기실에 나란히 앉은 그녀와 철식의 이야기에서 소설이 시작된다. 대기실에는 다양한 사연을 지닌 예비 이혼 부부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부부란 무엇인지. “부부가 그렇게 무서운 거란다……” (61쪽, 이혼)라는 외할머니의 말이 생각난다. 외할아버지와 오래 살고 싶었어도 고작 육 년을 살고 홀로 된 외할머니, 아버지와 이혼하고 싶어서 가출도 두 번씩이나 했지만 끝내 먼저 보낸 아버지 영정 앞에서 서럽게 울던 어머니, 먼저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는 영미 선배, 그리고 지금 남편과 이혼하기 위해서 법원을 찾은 그녀,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부부란 어떤 사이인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게 된다. 

     

“그녀는 결혼한 지 일 년쯤 돼 들어선 아이를 유산했을 때도 그가 곁에 없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욕실 천장에서 물이 샌다며 밤늦게 아랫집 남자가 올라왔을 때도, 보일러가 고장 나 수리 기사를 불러야 했을 때도, 전세 기간이 다 되어 새로 이사 갈 집을 알아보러 다니던 동안에도, 유산 후 임신이 되지 않아 산부인과에서 불임 상담을 받기로 예약되어 있던 날에도. 그리고 얼마 후 그녀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을 때도. 그녀는 그에게 묻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회적 약자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고통을 낱낱이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하는 그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의 고통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무감각할 수 있는지.” (57쪽, 이혼) 

     

그럼에도 남편 철식은 나이가 오십이 다 되어 가면서도 자신만 생각해 달라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네가 날 버리는 것은 한 인간의 영혼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므로 앞으로 네가 쓰는 시는 거짓이고, 쓰레기야.” (59쪽, 이혼) 그녀에게 무책임할 정도로 소원한 철식도 정작 이혼 앞에서는 이혼까지 가게 된 이유를 그녀에게 덮어씌우는 데에만 열심이다. 그래서 과연 부부란 무서운 것일까?  

   

<읍산요금소>를 통과하는 차에는 제각각 사연이 있다. 특히 요금소를 나가면 요양원과 기도원이 있다. 그곳에 가는 사람들은 왠지 인생의 끝자락을 정리하러 가는 사람으로 보인다. 요양원 부속 시설로 장례식장과 납골당도 있다. 말 그대로 “햇빛요양원에 입소하면 침대에서 장례식장으로, 화장터로, 그리고 마침내는 납골당으로 풀코스처럼 이어지는 것이다.” 


요금소에 오래 있다 보니 통행요금에 따라서 뒷좌석 노인이 얼마나 먼 곳에서 온 사람인지? 판별이 가능하다. 그 말은 “회귀를 기약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멀리까지 날아온 늙은 철새의 불안 같은 것이 노인의 얼굴에 깃들어 있는 걸 확인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주행한 거리에 따라 통행료가 매겨진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녀는 어쩐지, 통행료가 천차만별인 것이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햇빛요양원을 찾아오는 승용차에 한해서는 통행료를 똑같이 매겨야 한다는 생각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요금소에는 영성기도원의 승합차도 들어온다. 사람이 팔과 다리가 꼬이고 뒤엉킬 정도로 그득 타고 있는 폐차 직전의 승합차이다. 기도원에 들어오는 사람이나 승합차나 모두 주어진 수명의 끝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승차자의 연령대는 다양하지만 하나 같이 적나라하고 극적인 표정들이다. 사나흘에 한 번씩 요금소를 통과하는 승합차는 언제나 정원 초과였다. 생각 같아서는 개개인에게 각각 통행료를 받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매번 그냥 승합차를 보낸다.

      

요금소를 통과하는 차량을 보면서 그들의 생을 잠시 잠시 들여다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와중에 그녀에게 흑심(?)을 품은 사내와 그녀를 그 사내에게 보험 건수와 맞바꾸어 버린 동창 친구도 등장한다. 도무지 무슨 생각으로 그녀를 팔아먹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다양한 군상의 인간들이 통과하는 요금소는 마치 현실 세계에서 어디 먼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지점처럼 여겨진다. 단순한 요금소를 배경으로 작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있다. 

     

<새의 장례식>에는 두 남자가 등장한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둔 전남편과 현재의 남편이다. 현재의 남편이 전남편을 찾아와서 만남이 이루어진 것인데, 무엇 때문에 찾아올 생각을 한 것인지는 모른다. 생각지도 못한 꿈 이야기를 들먹이면서 말이다. 전남편과의 이혼 사유는 아마도 가정폭력이었을 것이고, 그로 여자는 인해서 일종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폭력성을 그대로 물려받은 전남편은 현재의 남편과의 대화를 통해서 여자의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을 치유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새, 십자매의 장례식은 “죽어!”라고 소리친 윗집 꼬마의 폭력성에 굴복할 수 없었던 가련한 새의 종말이었을까? 그 새가 의미하는 것은 혹시라도 여자 자신은 아니었을까? 

     

마치 계획했던 것처럼 세 작품 모두에 가정폭력이 등장한다. 대항하지도 못하고 맞아야 했던 폭력의 기억은 어떤 방법으로도 치유되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은 사랑스러운 결합이나 상대방에 대한 구제의 장이 아니었고, 폭력의 시작이었다. 그 끝에 보이는 파멸은 누구든 예견할 수 있었음에도 결국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지게 된다. 


소설의 결말은 읽는 사람의 몫인 것 같다. <당신의 신>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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