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분명 여름의 끝자락이 흘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작 그곳에 있음을 의식하고 돌아보면, 어느샌가 저 멀리 떠나버린다. 아마 분명 앞으로는 점점 내 옆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져 갈 것이다. 가을은 원래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어린 시절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면 가을이 왔고, 코스모스 희롱하던 고추잠자리 떠나면 가을도 깊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요즘은 고추잠자리 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도대체 모두 어디에 갔을까? 가을은 소리 없이 왔다가, 낙엽 날리는 소리에 슬며시 얹혀 나를 떠난다. 창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서늘한 새벽바람 타고 나에게 찾아왔다가, 닫힌 창문 밖에서 서성이다 돌아서는 겨울바람에 떠밀려 내 곁을 떠난다. 만나는 반가움의 인사도, 떠나는 아쉬움의 인사도 그냥 건너뛰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다. 가을은 그렇게 설 곳을 잃어가고 있다.
올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하긴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라며, 해가 갈수록 더위가 더욱 기승을 부린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되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유난스러운 더위였다. 오죽하면 가을이 이미 시작된 지금까지도 더위를 이기지 못해서, 여름과 가을을 합한 ‘여가’라는 새로운 계절까지 생겨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거실 창가에 앉으면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 따라 채 밀려가지 못한 여름 햇볕이 거실 안 깊이 얼굴을 들이민다. 아직은 갈 때가 아니라는 표정이다.
가을은 사색과 낭만의 계절이라는 지위까지 빼앗긴 지 오래되었다. 천고마비나 독서의 계절이니 하는 말은 한참 전부터 서가 한쪽에 꽂힌 낡은 세계 문학전집 안에서 조용히 잠자고 있었고, 그 잠을 깨워야 하는 손길마저 늦더위에 늘어져 하품하는 입을 가리기에도 급급하다.
나는 또 준비도 없이 가을을 보내야 한다. 아니, 내가 미처 안녕을 고할 사이도 없이 가을이 먼저 떠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운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잠깐 얼굴을 내밀었다 떠난다 해도, 아무리 가을이 소리 없이 사라져 간다고 해도, 나는 내년을 기다린다. 내년 이맘때쯤이면 언제 떠났었냐는 듯 내 곁을 찾아와 머물 것이다.
그리고 서로 짧은 안부를 물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