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정문학관을 출발하여 사십 분 정도 달리다 보니 멀리 앞에 질마재시인마을과 미당시문학관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질마재 마을은 서정주가 태어난 고향이고, 지금은 그곳에 고창군과 동국대학교 미당연구소가 협약을 맺고 운영 중인 미당시문학관이 있다. 문학관은 마을 한복판에 있던 폐교된 봉암초등학교 선운리 분교를 문학관으로 새롭게 조성한 문화 공간이다. 마치 폐교된 진보 제일고 건물을 증‧개축한 건물을 문학관으로 조성한 길 위의 작가 김주영의 객주문학관과 비슷하다. 그러고 보면 폐교된 학교부지의 활용을 놓고 고민하는 지자체가 있다면 반드시 문학관이 아니더라도 적당한 문화 공간으로 새롭게 조성하는 것도 좋은 생각일 것 같았다.
서정주의 시는 우리도 학창 시절 교과서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로 시작하는 <국화 옆에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으로 시작하는 <푸르른 날>, 그리고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지는 말고”로 시작하는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와 같은 시는 설혹 시를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 번쯤은 귀에 담았을 법한 名詩라고 할 것이다. 생전에 15권의 시집을 남긴 서정주는 아름다운 시어의 마술사와도 같다. 물론 그의 시어가 특별하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우리말로 평범치 않은 아름다운 시를 썼다는 사실에 문학관을 들어서며 이유 모를 경외감마저 느꼈다.
문학관을 들어서자, 인상 좋은 해설사님께서 빼꼼 얼굴을 내밀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 간단하게 문학관을 둘러보는 순서를 이야기해 주시면서 편하게 돌아보라고 하신다. 입구 바로 정면에 서정주 연보가 있다. 질마재 마을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초등학교(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서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광주학생운동 지지자로 지목되어 퇴학당하고 구속된 이야기, 이후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수학한 일,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과 함께 창작 생활을 시작한 일, 꾸준히 글을 쓰던 도중에 불거진 친일 작품 발표 사건들 그리고 이후의 창작 생활과 각종 문학상 수상 사실에 대하여 연도별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그런 사실은 문학관을 찾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들이므로 그냥 한 번 훑어보고 지나쳤다.
미당시문학관은 학교 건물을 개조하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보통의 문학관과는 공간 배치가 조금은 달랐고, 관람 동선도 계단을 오르내리는 등 조금은 신선하게 느껴지기까지도 했다. 단지 무릎이 편치 않은 아내는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 그냥 1층의 전시실만 관람해야 했던 일이 안타까웠다. 서정주 연보를 뒤로 하고 전시실 입구를 바라보면 “우리말 시인 가운데 가장 큰 시인 미당 서정주”라는 글귀와 함께 서정주의 옆모습이 관람객을 반긴다. 그리고 이어서 전시실 오른 벽에 서정주의 친필 시 액자와 흉상이 자리 잡고 있다.
미당의 그림자라는 제목 아래에 “미당에게 명예만 있지는 않았다. (중략)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 시를 쓰기도 했으며 (중략)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신군부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여...”라는 글로 시작하는 서정주에게 씌워진 친일 문인이라는 멍에에 대한 소회가 걸려 있었다. 물론 그 시기에 친일을 언급하자면 서정주 이외에도 많았다. 하지만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반성 없는 정당화가 더욱 그들을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 것도 사실이다. 채만식도 그러지 않았는가? “한번 살에 묻은 대일협력의 불결한 진흙은 씻어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죄의 표지였다.”라고. 하지만 그 후 자신의 행위에 대한 속죄를 당당하게 글로 밝히면서 자신이 잘못했음을 평생 안고 살았다. 물론 서정주의 “미당의 그림자”라는 글에 드러난 그의 입장을 보면 그도 친일 문제가 분명히 잘못된 일이며 깨끗하게 청산되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그런 글을 읽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시인의 시 세계와 시와는 관련 없는 정치적 성향에 대한 행적이 나란히 공존할 수 있는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다. 이런 나의 의문에 해답을 준 사람은 바로 김춘수였다.
전시실 초입에 서정주와 가까운 문인들이 바라본 서정주와 그의 문학예술에 대한 평가가 한 마디씩 적혀 있었다. 아마도 전시실을 기획한 사람은 분명 서정주의 친일 행적이 문학관을 찾는 사람들에 의해 항상 입에 오르내릴 것을 염려했음이 분명했다.
미당의 시로 그의 처신을 덮어버릴 수는 없다.
미당의 처신으로 그의 시를 폄하할 수도 없다.
처신은 처신이고 시는 시다.
-시인 김춘수
서정주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읽어 가다가 김춘수의 말 앞에서 잠시 서 있었다. 그렇다. 처신은 처신이고, 시는 시가 아니겠는가? 미당은 한국어가 살아있는 한 죽지 않고 영생할 것이라는 주변의 평가를 보아도 김춘수가 하는 말의 진의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정주는 가족애가 특별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시물에도 그런 그의 애정이 새록새록 배어 있었다. 특히 어머니와 아내를 향한 그의 애정은 그 어느 것으로도 덮을 수 없어 보였다. 액자에 담긴 흑백 사진 아래로 시의 초고처럼 보이는 친필 글귀들이 삽입되어 있었다.
내 아내
나 바람 나지 말라고
아내가 새벽마다 우물가에 떠 놓은
삼천 사발의 냉숫물... 이라든지,
옥수수
내 아내 옥숙이는 옥수수를 잘먹어요.
아마도 이름이 비슷해서 그런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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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든지 하는 글들을 보면 서정주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직접 보고 경험하지 않았어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아내가 소천 후 서정주가 두 달 동안 곡기를 끊고 있다가 아내를 따라갔다는 대목에서 나는 아내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도 당신이 먼저 가면 두 달 반 동안 아무것도 안 먹고 있다가 따라갈까?” 내 물음에 아내는 웃으며 말한다. “아이고, 그냥 드실 것 다 드시고 천천히 따라오기나 하셔.”
교사의 특징상 건물의 중앙에 4층 높이까지 계단실이 있었는데, 문학관 운영자 측에서는 그 계단도 알뜰하게 활용해서 전시물을 채웠다. 계단이다 보니 스킵 플로어 형태로 계단을 반 층 올라가면 서재 재현실도 있었고, 학창 시절의 친우들과의 기록, 주위의 문인들과의 추억이 담긴 기록 사진, 그리고 맨 위층에 서정주의 친일 행적과 관련한 기록실을 따로 마련해 두었다. 그곳에는 서정주의 친일 시 ‘항공일에’를 비롯하여 친일 소설의 일부, ‘반도학도 특별지원병 제군에게’라는 헌시 등이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다. 아울러 그곳에 서정주의 친일 변명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물을 잘 관람하다가 그 액자 앞에서 발이 멈췄다.
“그러나 이 무렵의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있다. (중략) 나는 이때 그저 다만 좀 구식의 표현을 하자면 ‘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 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에 적당한 말이라면 ‘종천친일파(從天親日派)’ 같은 것이 괜찮을 듯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분명 서정주의 행적과 시와는 관련이 없다고 하고 싶었다. 나도 어린 시절 서정주의 시를 좋아했지 않은가? 그런데 그때는 몰랐던 그의 행적들로 인하여 그의 시를 싫어하게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아무튼 서정주의 문학관을 찾는다면 언젠가는 이런 사안에 대한 고민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진작에 했었는데, 그날이 오늘이었던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전시관의 가장 안쪽에서는 질마재 신화 출간 50주년 기념 질마재 이야기 사진전이 개최되고 있었다. 우리는 시간을 잘 맞춰서 간 셈이었다. 사진은 질마재의 옛 모습을 찍은 사진과 외할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적은 액자가 걸려 있고 중앙에는 터널 형태의 유리 구조물에 질마재 사진과 서정주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그렇게 전시실을 다 돌아보고 입구로 나오니까, 해설사님이 기다리고 있다가 전시물에는 기록되지 않은 미당 관련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곳에서 마침 서정주의 시집도 판매하고 있었는데, 나도 한 권 사고 싶어서 이 책, 저 책 뒤적이다가 동천(冬天) 시집을 골라 들었다.
문학관을 나와 전면에서 건물 전체가 들어오게 사진을 한 장 찍고 문학관을 떠났다. 다음은 섬진강 시인으로 잘 알려진 김용택 시인의 “김용택의 작은 학교”에 들릴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