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는 한국에 오기 전부터 한글을 읽을 줄 알고 있었다. 물론 의미는 모른다. 단지 초성 중성 종성으로 이루어지는 한글 글자의 구성 원리와 자음과 모음의 발음에 관한 기본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길거리에 걸린 모든 간판은 다 읽지만, 그 단어의 뜻은 모른다. 그리고 그런 단어를 조합해서 문장을 만들 줄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정도만 읽어도 어디인가? 일단 한국어를 익히는 기본은 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더군다나 아들과 이야기하는 도중에 들었던 관용적인 표현도 몇 가지는 알고 있으니, 이제 체계적인 한국어 교육기관에서 강의를 통해 한국어를 배우면 빠른 속도로 한국어를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지난달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한 일은 외국인 등록증을 신청하는 일이었고, 아들이 출국하고 난 후에는 발급된 외국인 등록증을 갖고 한국 통신사의 전화번호와 은행 계좌번호 개설, 그리고 한국어학당 등록 신청이 다음으로 할 일이었다. 그래서 아들이 있을 때 한국어학당을 결정하기 위하여 여러 대학을 검토하다가 외국인이 많이 수강하는 Y대 한국어학당에 문의했다. 마침 내년 봄 학기의 등록 기간 중인지라 서류 준비만 가능하면 곧바로 접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서류는 다 좋은데, 한국으로 치자면 호적등본과 비슷한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하지만 그 서류는 중국에서 발급하는 서류인지라 등록 기간 내에 제출이 힘들 것 같기에 다른 방법이 없냐고 물어보았다. 그 서류를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며느리 자신은 이미 혼인 신고 후 부모님의 호구에서 분리되어 나왔는데 어떻게 서류상으로 부모님과 자식 사이의 관계를 입증할 수 있겠냐? 이미 한국인과 혼인 신고가 되어 있으니 혼인 관계 증명서로는 대체할 수 없느냐? 등등. 하지만 대학 당국은 요지부동이었다.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행정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내가 옆에서 거들었다. 한국에 온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하는데, 그것도 신원이 확실한 사람인데 왜 그렇게 한국어를 배우는 과정이 어렵냐? 그러지 말고 다른 한국어학당을 알아보자. 어디 한국어학당이 거기에만 있냐? 하면서 이번에는 S대 한국어학당에 알아보라고 했다. 만일 그곳에서도 비슷한 서류를 요구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사실 Y 대는 지금 우리 집에서 다니기가 만만치 않다. 내가 전철역까지 데려다줘도 환승 포함 가는 데에만 한 시간 반은 걸린다. 가뜩이나 시간 때문에 망설이다가 문을 두드린 건데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S대 홈페이지를 열었다.
물론 S대도 집에서 가기는 만만치 않다. 하지만 서류라도 제출할 수 있다면 해 볼 요량으로 홈페이지를 열어 본 건데, 뜻밖에 집에서 가까운 시흥 캠퍼스에도 한국어 과정이 있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그곳은 Y대를 포기하게 만든 그 서류와 비슷한 서류는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 시흥 캠퍼스라면 내가 며느리와 함께 손자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곧바로 가 봐도 삼십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다. 그리고 끝나면 내가 데리고 왔다가 함께 어린이집에 가서 손자를 데리고 오면 된다. 얼마나 환상적인 위치인가? 이런 것을 보고 새옹지마라고 하던가? 아무튼 일단 접수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들은 출국했고, 며칠 후 며느리가 맥이 빠진 얼굴로 나를 불렀다.
“아빠, 나 이거(한국어학당 등록) 못할 것 같아요.”
나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물었다.
“왜? 서류가 없어?”
“그게 아니라...”
며느리가 한국말이 서툴러서 의사소통은 잘되지 않았지만, 내막을 듣고 보니 서류 하나가 부족하다고 했다. 대학원 석사 과정 성적증명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자기가 갖고 있는 것 말고 학교에서 공증인가 뭘 한 것으로 제출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공증 본이 도착하는데, 이십일 걸린다고 하고 지원서 접수 기간은 그전에 끝난다고 했다. 잠시 생각하다가 내가 한국어학당에 전화해 보기로 했다. 전화해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무슨 방법이 없냐고 물었는데, 그쪽에서는 사정이 그렇다면 일단 인터넷으로 접수하고 나서 서류가 도착하면 이메일로 보완해 달라고 하였다. 며느리에게 이야기해 주니 우울했던 며느리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그 후, 이십일 걸릴 줄 알았던 서류가 의외로 이틀 만에 도착하는 바람에 곧바로 이메일로 보내 주고 다시 수신 확인 전화를 해서 확실하게 접수가 완료된 것을 확인하였다. 이제 지원자가 할 일은 모두 끝났고, 1월에 합격자 발표만 기다리면 된다.
합격 발표를 기다리며 며느리가 책으로 한국어 공부를 하겠다고 하기에 교보문고를 검색하여 S대 언어교육원에서 출간한 한국어 교재를 주문해 주었다. 책을 받은 며느리는 책값이 얼마냐고 물었다.
“아빠, 이 책 얼마예요?”
“왜? 아빠한테 돈 주게? 하하하. 아빠가 돈은 없는데, 네가 공부하는 데 필요한 책을 산다고 하면 얼마든지 사줄게. 부담 갖지 마.”
그랬더니 며느리가 활짝 웃으며 말한다.
“아빠, 고마워요.”
그렇게 며느리의 한국어학당 도전기는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