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열이 나다.

by 정이흔


며칠 전에 예약한 점심을 먹으러 인천 H 호텔로 향했다. 이렇게 말을 시작하면 부유한 점심을 즐긴다고 오해할 사람도 있겠지만, 실상은 경제적인 식사였다. 어른 4인이 1인 식비로 만찬을 즐겼으니 경제적인 외식이지 않을까? 아무튼 손자까지 다섯 명이 가서 배가 부르게 먹었다. 그리고 기왕 온 김에 조금 더 놀다 들어가자고 하고는 바로 옆 P 호텔로 갔다.


마침 호텔 로비에서 아이들을 위한 간이 퍼레이드 시간이 되었길래 우리도 아이들 틈에 서서 공연도 즐기고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은 넓은 공간으로 이동해서 손자를 한 바퀴 돌리고는 다시 H 호텔로 돌아와 집으로 향했다. 뒷좌석 3인은 이미 출발하자마자 눈을 감았고, 이윽고 한 시간이 안 되어 집에 도착했다.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손자가 열이 난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잘 먹고 잘 놀고 왔으면서도 집에 오자마자 열이 난다고 하니 갑자기 걱정되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아이에게 열이 나는 것은 가장 조심해야 하는 증세라고 알고 있었는데, 막상 금요일 오후 병원도 문을 닫은 시간에 아이가 열이 나는 것을 보니 무엇부터 챙겨야 할지 마음만 급해졌다. 부랴부랴 인터넷을 검색해서 주변에 평일 늦게까지 진료가 가능한 소아청소년과를 찾았다. 처음 전화한 곳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음만 더 급해졌는데, 두 번째 전화한 병원에서 다행스럽게 진료가 가능하다는 대답을 듣고는 며느리와 손자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마음이 불안하다 보니 별생각이 다 떠올랐다. 혹시 병원 앞에 주차 공간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아내도 함께 와서 내가 일행을 내려주고 주차 공간을 찾는 동안 아내에게 먼저 병원에 들어가 보라고 해야 할 것을 그냥 나 혼자 온 것은 아닌가? 뭐 그런 생각까지 떠올랐는데, 다행스럽게 건물 지하에 주차가 가능한 병원이었다. 차를 세우고 병원으로 올라갔다. 미리 전화했던 까닭에 간호사가 신속하게 안내해 주었다. 의사 선생님이 꼼꼼하게 문진과 진료를 끝내고 나서 설명해 주는 얼굴을 보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만 그래도 불안하기는 여전했다.



지금으로서는 정확하게 발열의 원인을 짐작할 수 없으니 일단 해열 처방과 목이 부은 것에 대한 항생제 처방을 하겠다고 하면서, 만일 내일도 열이 내리지 않으면 곧바로 병원으로 오라고 하셨다. 그때는 정식으로 독감 검사도 하고 좀 더 세밀한 진료를 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열이 내려도 일요일에 한 번 더 오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병원이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오후 다섯 시까지 진료한다고 했을 때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생각했는데, 산부인과와 함께 진료하는 소아청소년과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부인과는 24시간 진료하는 곳이 많으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집에서 잴 때 체온은 양쪽 귀에서 38.2℃에서 38.6℃를 오르내렸는데 병원에서 잰 체온은 39.0℃였기에 저녁 약을 먹은 후 2시간 이내로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추가로 처방한 해열제를 먹이고, 그래도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내일 꼭 오라는 말을 듣고 진료실을 나왔다.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며느리에게는 집에 와서 번역기를 동원하여 설명해 주었는데, 며느리는 약을 먹이는 것에 자신이 없다고 하면서 나에게 먹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한다. 그런데 솔직히 나도 아이에게 약을 먹일 자신은 없었다. 어차피 모두가 자신 없을 바에는 며느리에게 먹이라고 했는데, 뜻밖에 손자가 약을 잘 먹는 것이 아닌가?


약을 먹은 손자는 함께 놀자느니 배가 고프다느니 하면서 평소의 저녁 시간처럼 가족에게 매달렸다. 그런 것을 보면 비단 약 기운뿐 아니라 열이 났던 것이 독감처럼 조금 심각한 증상이 아닌 일시적 증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늦은 저녁들을 먹고 손자는 놀이에 빠졌다. 그리고 약을 먹은 지 한 시간 반이 지나서 체온을 재 보았더니 양쪽에서 약 1.2℃씩 열이 내렸다. 다행스럽게 추가 해열제를 먹이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아침에도 열이 계속 내리면 병원에 갈 필요도 없을 것 같았고, 대신 열이 내려도 일요일에는 꼭 오라고 했으니 일요일 점심 약까지만 먹고 병원에 가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몇 시간의 긴장은 스르르 풀렸다. 다행스러운 점은 며느리가 한국의 의료 시스템에 무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며, 아들이 열이 나도 한국 의사에게 보이면 금방 열이 내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사람도 많은 까닭에, 병원에 가서도 기다리기 일쑤였는데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며느리가 손자를 데리고 병원에 갈 때마다 손님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원래는 사람이 많을 수도 있는데 우리가 갈 때 마침 사람이 없었던 거라는 이야기로 며느리의 환상을 깨고 싶지는 않아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어 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놀던 손자는 며느리의 손을 잡고 “엄마도 쿨쿨, 콩콩도 쿨쿨”을 외치며 자기 방으로 향했다. 기특한 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졸리면 무슨 이유를 대든 찡얼거리며 울다가 잠이 들었는데, 지금은 스스로 욕실에 가서 이를 닦고 방으로 들어가는 즉시 불을 끄고 잠이 든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그렇게 며느리와 손자는 잠이 들었다. 내일 아침에 약을 먹고 나서는 열이 모두 떨어지면 좋겠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내린 눈이 공장 건물들 지붕 위에 하얗게 내려앉았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얼른 사진을 몇 컷 찍었다. 그러면서도 길 위에 쌓인 눈을 보고 내일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될 것을 생각하니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손자의 고열 사건은 막이 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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