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기가 제일 센 곳! 세도나 란다. 2015년 그랜드캐년을 여행하며 어느 관광객에게 들었던 말이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며 기사를 찾아보니 세도나는 지구 상에서 가장 강력한 전자기파인 볼텍스(vortex), 즉 기(氣)가 넘치는 땅이란다. 기도 기지만 일정에 세도나를 넣은 이유는 피닉스에서 모뉴먼트 벨리를 가려면 다섯 시간 이상 운전을 해야 하니 하루 묵으며 기(氣) 체험을 하기로 했다. 사실 속으론 세도나와 계룡산을 비교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결혼해 22년 대전에 살며 사시사철 기가 세다는 계룡산에 놀러 갔다. 봄에는 벚꽃을 구경하러, 여름에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러, 가을엔 산체 비빔밥과 막걸리를 먹으러, 겨울엔 눈꽃을 보며 닭볶음탕을 먹기 위해서 말이다. 매번 동학사는 기본이고 가끔은 등산복을 챙겨 입고 남매탑이나 은선폭포, 관음봉을 올랐다. 살면서 점집 한번 찾지 않았지만 계룡산을 다녀오면 기분이 좋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랑하는 가족과 공기 좋은 곳에서 맛난 음식을 먹고 쉬니 좋지 않겠는가! 남편은 장난으로 "우리 아이들은 계룡산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라고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기로 유명하다는 세도나가 기대됐다.
피닉스에서 오후에 출발해 저녁 즈음 세도나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고 호텔에 멍하니 앉아 있으니 딸이 주변 산책을 나가자 했다. 목도리를 하고 호텔을 나섰다. 공기는 차가웠고 마을은 어두웠다. 조금 걷다 하늘을 보니 별이 빛났다. 차갑고 맑은 공기 속에 별빛은 흔들렸다. 셋이 별자리를 말하다 별을 찍었다. 쉽게 찍히지 않을 듯했는데 한국에 돌아와 큰 모니터로 살펴보니 별들이 깔깔 몸을 흔들며 웃는 듯 보였다. 공기가 맑고 짙은 어둠 속이라 별들끼리 웃고 떠든 듯하다.
세도나 호텔 앞에서 찍은 오리온자리별..
호텔 위치가 도로 옆이었지만 세도나의 밤은 조용했다. 새벽에 일어나 핸드폰으로 한국 뉴스를 읽다 자고 있는 아이들을 한동안 바라봤다.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딸이나 맞은편 침대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 자는 아들이 언제 이렇게 컸나 싶다. 딸이 대학교를 간 이후 이렇게 오랜 시간 한 침대를 쓰긴 처음이다. 처음 며칠은 조심하며 잠을 잤는데 며칠이 지나니 익숙하다. 자식도 성인이 되면 조심스럽다.
딸이 세네 살 때 우리 둘은 꼭 붙어 잠을 잤다. 남편이 레지던트 때라 집에 오지를 않았으니 나는 딸과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놀이터를 가고, 같이 목욕을 했다. 퇴근 후 출근 시간까지 딸은 늘 나와 붙어 지냈는데 그 시절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퇴근 때 퀭한 눈으로 달려와 내 품에 안겼던 딸이 스쳤다. 그 작던 딸이, 품에 쏙 안겼던 딸이 나보다 덩치 큰 성인이 되었다니. 자고 있는 모습에 여러 마음이 스쳤다.
딸 단발머리를 쓰다듬다 미국에 와서 스포츠머리로 싹둑 자른 아들 머리를 바라보니 두 아이 모두 중학생 때 머리 모양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곤히 자고 있는 딸이나 아들이나 한 인간으로 얼마나 당당하고 의젓하게 성장했는지.... 마음이 뭉클했다. 둘 다 중학교 때 모습이 얼비쳤지만 얼마나 많은 시간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며 성장하였는지 엄마인 나조차 짐작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의 엄마가 나의 성장을 지켜보았지만 나를 알 수 없었듯 나도 내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았지만 그네들의 삶을, 내면을 알 수 없다는 그 불확실성이 되려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알 수 없는 미래를 그네들이 온전히 현명하게 개척해 나갈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새벽 기운이 호텔 창문을 두드렸다.
아침에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고 국립공원 티켓을 구매해 종모양 바위(bell rock) 주차장으로 향했다. 바위 모양이 종을 땅에 엎어놓은 형태라 붙여진 이름이란다. 멀리서 보니 바위 모양이 정말 종을 엎어놓는 형태였다. 길은 사방에 있고 관광객들이 사방에서 벨록으로 향했다. 구름이 낮고 두터워 날은 싸늘했다. 아들이 성큼성큼 길을 나섰고 딸과 나도 벨록을 향했다. 2015년 미국 연수기간 중 가족여행을 나가면 중 1학년이던 아들은 또 걷느냐고 불만이 가득했는데 6년이 지난 이번 여행에선 짐을 먼저 들고, 먼저 길을 나서고, 사진을 찍었다. 자녀의 성장엔 부모의 기다림과 인내가 기본임을 다시 깨닫는 여행이었다. 재촉한다고 2월에 피는 매화가 1월에 필 수는 없지 않겠나? 매화나무도 자기 때를 아는데 아이들이 모르겠는가? 바위를 걸으며 아이들의 때를 재촉하지 않은 나의 과거에 미소를 보냈다.
두 아이들이 성큼성큼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는 즐거움이 얼마나 크던지... 벨록 중턱에 올라 사진을 찍었다. 가족단위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사진을 찍었다. 벨록 바위는 크고 오르는 길도 미끄러워 조심하지 않으면 사고가 날듯했다. 딸과 아들이 동시에 "엄마! 그만 올라가요" 했다. 내가 생각해도 장갑도 없이, 등산화도 없이 더 올라가긴 미끄러워 보였다. "날이 흐리니 눈이 올 수도 있겠다. 그러면 내려가자" 내가 너무 쉽게 발길을 돌리니 아이들이 의외라는 듯 날 쳐다봤다. 산을 타다 끝까지 가지 않고 내려가긴 처음이니 말이다.
홀리 크로스 채플 (Chapel of Holy Cross)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붉은 바위에 기다랗게 세운 성당은 아름다웠다. 바위산 아래서 보면 길쭉한 직사각형 구조물이 바위와 어우러져 특색 있는 모습이었지만 워낙 주변 바위들의 형태와 색상이 독보적이어서 성당 자체의 느낌은 크지 않았다. 막상 성당 입구에 올라 성당을 보니 성당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규모가 작았다. 50명이나 들어갈까 싶은 작은 공간이었지만 성당에 들어서니 작은 탄성이 나왔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 뒤로 한없이 넓고 깊은 빛들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느 성당이던 아이들이 없이 들어가면 잠시 앉아 아이들을 위한 기도를 하였건만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오니 남편을 위한 기도를 했다. 가족이란 부재를 통해 사랑을 깨닫기도 한다.
성당을 나와 에어포트 메사(Airport Mesa)로 향했다. 날이 싸늘했다. 에어포트 메사에 도착해 짧은 트레킹 코스를 걷자 하니 두 아이들이 흔쾌히 나섰다. 많은 가족들이, 연인들이 트레킹을 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모두 노 마스크였다. 한 사람이 걸을 수 있는 좁은 길을 마주 오는 여행객과 스쳐 지나가며 오미크론에 감여 되지 않기를 기도했다. 구름이 낮고 두텁게 깔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지만 30분 걸으니 땀이 났다. 전망대에 올라 시원한 풍광을 보며 아이들과 사진을 찍었다. 아름다운 바위산도 드넓은 대지도 참 부러웠다. 국토가 작아 오밀조밀 모여 살며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배가 고팠다. 두 아이들이 식당을 찾아 햄버거를 시켰다. 맛났다. 오전 내내 산책을 했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날이 좋았더라면 너무 아름다운 장소일 텐데 아쉬웠다. 딸과 아들에게 "너희들은 나중에 피닉스와 세도나는 여유 있게 즐겨라. 이삼일 머무르면 좋겠네." 했더니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딸! 나중에 자식 낳으면 네가 여행 스케줄도 잡고 가고 싶은 곳도 챙기고. 남편에게만 의지하지 말고." 내가 웃으며 딸에게 말하니 무슨 결의라도 세우듯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래야죠. 여기는 제가 먼저 와봤으니 그래야죠. 미국 고속도로 운전도 어렵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딸의 대답에 아들을 보고 물었다.
"너도 아이들 데리고 이런데 오겠니? 너 기억나나 모르겠지만. 너 어려서 안 걷는다 기를 썼는데. 네 아들도 그러면 어쩌니? 다리 아파요. 못 걷겠어요. 하면..." 아들이 빙그레 웃었다. "아이가 있으면 잘 데리고 다녀야죠. 뭐 어쩌겠어요."
딸이 가자미 눈을 뜨고 동생을 째려보며 말을 던졌다.
"엄마. 쟤가 기억하지 그걸 못하겠어? 자기 자식 낳아서 당해봐야 자기가 얼마나 투정을 부렸는지 알지. 기억나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 봐." 아들은 딸이 지난 추억을 풀어놓자 시종일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햄버거를 먹으며 두 아이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미래의 자녀를 상상하며 담소를 나눴다. 모를 일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펼쳐질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는 말이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부모가 그랬으니 나도 그럴 거야 하던 시절이 아니니 말이다. 셋이 모두 웃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모뉴멘트 벨리로 향하며 세도나의 기(氣)를 생각했다. 사람이나 장소나 중요한 것은 기(氣)가 세거나 약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기가 있느냐 없느냐다. 기가 센 장소이던지, 기가 센 사람이던지 내가 사랑하지 않는 장소, 사람은 의미가 없다. 그러니 미국에서 가장 기가 세다는 세도나나 대한민국에서 한 기 하는 계룡산이나 그곳들은 그저 아이들과 함께 여행한 즐거운 장소일 뿐이다. 그러니 기가 센 곳에 가서 기를 받는다는 둥, 좋은 기운을 얻는다는 둥 하는 말들은 진정한 사랑을 주고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하소연이지 싶다. 기를 받고 싶으면, 좋은 기운을 받고 싶으면 멀리 산을 찾고 점집을 찾지 말고 옆에 있는 가족을 찾아 사랑하시길.. 세도나 여행은 가족이란 울타리에서 사랑의 기(氣)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