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치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커네브에 도착하니 마음이 놓였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은두려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그래서 그랬는지 오전에 봤던 모뉴먼트 벨리 기억이 흐릿했다. 며칠, 몇 달, 몇 년이 지나도 온전한 감동과 느낌이 남아 가슴을 설레던 때가 언제였을까? 감정이, 감동이 봄날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순간 다가왔다 사라지는 느낌이다. 몸의 나이 듦이 아닌 마음의 나이 듦인가 보다.
커네브는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골목마다 작은 호텔과 주유소가 있어 모뉴먼트 벨리와 그랜드 캐년을 들어가고 나오는 관광객들이 잠시 머무르는 마을인듯했다. 운전으로 지친 내가 침대에 누워있으니 아이들이 인근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사 왔다. 하루가 다르게 미국 내 오미크론이 급증하고 있었고 한국에 돌아가려면 출발 전 PCR 음성 확인서가 있어야 하니 아이들이 알아서 몸조심을 했다. 소파에 둘러앉아 캔 맥주와 스테이크를 먹었다. 너무 맛나서 셋이 깜짝 놀랐다. 오미크론만 아니라면 레스토랑에 앉아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즐거운 식사를 했을 터인데... 아쉽지만 어찌하겠는가? 일찍 잠을 청했다. 다음날 불의 계곡을 들러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긴 운전을 해야 하니 말이다.
커네브 호텔 숙소에서... 날이 좋아 행복...
아침에 커튼을 걷으니 호텔 앞 길가에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어둠 속에서 하얀 눈이 오셨나 보다. 마을의 조용함과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흰 눈이 좋았다. 아침을 먹고 불의 계곡으로 출발했다. 광대한 땅에 직선으로 끝없을 듯 뻗은 긴 길을 달렸다. 고속도로를 나와 몇몇 마을을 지나갈 때 경찰관이 손을 흔들어 놀라 멈춰 섰는데 경찰관이 오질 않았다. 몇 분 지나도 경찰이 오지 않아 다시 차를 출발했다. 차량속도를 낮추라는 신호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셋이 웃으며 출발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여행객들이 속도감을 잊고 마을을 지나가니 그럴 만도 하다. '경찰들이 졸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구나' 했다.
불의 계곡으로 가는 길... 그냥 이런 길이 계속
이 길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참에 불의 계곡이란 표지판이 나왔다. 딸이 표시해둔 장소라 사전 지식이 없는 나로선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표지판을 지나 조금 들어가니 국립공원 입구였다. 입장료를 받는 사람이 없었는데 입장료는 카드나 현금으로 내는 자율 페이 시스템이었다. 사람들이 서성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입장료를 냈다. 아들이 작은 주차장에 놓인 무인 가판대에서 노란 봉투를 꺼내 들고 차량번호와 핸드폰 번호를 쓴 후 영수증을 뗀 봉투에 돈을 넣고 수거함에 넣었다. 그리곤 떼어낸 영수증을 차량 안 백미러에 매달았다. 딸과 나는 입장료를 내는 아들을 보며 웃었다. 딸이 "이제 알아서 척척하네요" 하며 웃었고 나는 딸과 아들을 번갈아 보며 행복한 마음을 삼켰다. 두 아이들이 언제 이리 자랐을까? '세월이 화살같이 지나간다'라고 옛 어른들 그러더니... 오래된 말이 새 말처럼 가슴에 앉았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순간 나는 내 생에 가장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고 지금 다시 그때를 생각하니 그때가 젊었구나 한다는 사실이다. 젊음은 늘 지금에 있는데 과거의 젊음을 탐하다 늙음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은 아닌지?
불의 계곡은 바위들이 불꽃처럼 자유로운 형상이라 눈이 즐거웠다. 불의 계곡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트레킹을 하고 사진을 찍으며 경치를 즐겼다. 우리도 중간중간 차를 세우고 구경하고 혹은 지나치며 땅이 넓으니 정말 다양한 지구의 모습을 보는구나 했다. 불의 계곡은 광대함과는 다른 묘한 경치였다.
불의 계곡을 둘러보고 라스베이거스로 향했다. 운전을 하며 불꽃같은 붉은 바위들의 향연을 보고 나서도 정작 가슴에 남는 것은 딸이 계곡에 들어서 운전하며 귀여운 탄성을 내던 것이며, 코끼리 바위라 명명된 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활짝 웃던 모습이며, 자율 입장대 앞에서 아들이 초등학교 일 학년 때 일기를 쓰듯 입을 꼭 다물고 한 자 한 자 차량번호며 핸드폰 번호를 쓰던 모습이 내 가슴에 새겨졌다는 사실이다. 화염이 일듯 노란, 붉은 바위들이 이리저리 쏠리고 뒤틀린 모습보다 "엄마 저 코끼리 바위 좀 봐요" 하던 딸의 귀여운 목소리와 "좋네요. 멋있네요" 하던 아들의 담백한 목소리가 내겐 더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불꽃처럼 가슴에 새겨졌다는 것이다.
어쩌면 여행이라는 것은 낯설고 새로운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라기보다 다른 공간에서 내 안에 숨죽이고 있는 소중한 것을 일깨우는 시간을 나 스스로에게 주는 것은 아닌지 한다. 불의 계곡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지구의 열운동과 지각변동의 단면을 엿본 공간이기도 하였지만 내 안에 살아 숨 쉬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엿보는 곳이기도 했다. 지금도 불의 계곡을 떠올리면 환하게 웃던 두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불꽃처럼 떠오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