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왔다. 수도원 알베르게를 나오니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나서 걷고 있었다. 어제 피레네 산을 넘으며 시냇물처럼 흐르는 길을 계속 걸어 신발이 속까지 다 젖어 있었다. 걱정이 가득했는데 수도원 알베르게에서 준비해준 신문지로 세 번 구겨 넣고 꺼내길 반복하니 약간의 수분감만 남아있을 뿐 신발은 쾌적했다.
출발하며 든 생각은 쓸데없게도 한국 신문이 생각났다. 한국의 언론 지형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하는데 발행되는 신문지를 수도원 알베르게에 보내주면 참 좋아할 듯하다는 생각 말이다. 쓸데없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웃었다. 수많은 순례자들의 젖은 신발 속 수분을 제거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지 않을까? 여하간 신문지가 그렇게 유용하게 사용되는 줄 몰랐다
실제 체험을 하고 신기할 뿐이었다. 신문지의 내용을 떠나 그 유용성에 다시 한번 고개가 숙여졌다(참 아이러니하죠? 신문지의 유용성을 내용이 아닌 구겨져 사용되는 것에 느끼고 한국 신문이 그리 사용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기다니.)
오늘은 작은 언덕을 지나 숲길을 5시간 정도 걸었다. 여행 와서 만난 언니에게 상쾌하고 기분 좋은 구박을 받으며 길을 걸었다. 발단은 간단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얼마나 준비를 하고 순례길을 들어서게 됐냐 하시길래 두 달 전에 한번 가볼까 하고 왔어요. 언니는 얼마나 준비하셨어요? 하니 언니는 씩씩하게 앞서 걸으며 3년 전부터 이 길에 오려 차곡차곡 준비하셨단다. 그러시길래 왜 순례길의 상징이 가리비예요? 하고 물으니 너는 그런 것도 찾아보고 공부하지 않고 왔니? 하시며 귀여운 구박을 하셨다. 그냥 오고 싶어서 왔죠. 뭘 꼭 찾아봐야 하고 읽어 봐야 하나요? 하니 너는 기본이 안됐구나 하시며 상징의 의미를 전래동화 들려주듯 재미나게 말씀해주셨다. 내가 그걸 믿어요? 정말 그게 있을 수 있다 생각하세요? 하니 너는 믿음이 부족하구나? 그냥 믿어 이리저리 생각지 말고! 하길래 둘이 길이 걸으며 한참 웃었다.
나는 길이 있고 내가 걸을 수 있는 시간과 체력이 있어 왔을 뿐인데 온 정성과 기대를 안고 온 언니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기분좋은꾸지람을 들으니 좋았다. 무엇이든 그냥 물어볼 수 있어 좋았다.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자세를 볼 수 있어 좋았다. 5시간을 걸으며 아침에 날카롭고 묵직하게 아파오던 발바닥 통증이 준비 없이 왔니? 한 언니의 한마디에 모두 잊어버려 깜짝 놀랐다. 5시간중 3시간은 웃으며 왔다. 하도 크게 웃어 배가 고풀 지경이었다.
얼마 만에 듣는 꾸지람인지.. 정말 좋았다. 나의 큰 언니보다 두어 살 더 연배가 있는 언니여서 더 좋았고 손녀를 봐야 한다는 이유로 남편을 챙겨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주저하지 않는 언니라서 좋았다. 당당하고 유쾌한 언니의 발걸음을 따라 걷다 보니 힘든 언덕을 올라오면서도 즐겁고 질척이는 오솔길을 걸을 때도 즐겁고 안개와 비로 시야가 답답해도 행복했다. 사람이 주는 행복이 때론 자연이 주는 위로를 넘어설 때가 있는데 이곳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그런 행운을 만나니 너무 좋았다.
자신감과 열정을 같고 사는 큰 언니의 위트와 건강함이 숲길만큼이나 큰 행복을 주어 힘든 둘째 날도 견딜 수 있었다. 언니가 순례길 동안 건강하고 유쾌하게 긴 길을 마치길 바라며 오늘 하루 함께 함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