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작은 마당에 잔디와 나무를 심으니 곤충들이 살금살금 자리를 틀었다. 청개구리, 사마귀, 메뚜기, 방아깨비, 베짱이, 여치, 작은 거미, 개미, 노래기, 그리마(돈벌레), 오동통한 지렁이 등.... 곤충이든 벌레든 잔뜩 집을 틀었다. 원래 그네들의 집에 내가 자릴 튼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간 우리의 동거는 그리 시작됐다. 5월 이른 아침 마당을 나가 잔디를 밟으면 보일 듯 말듯한 작은 곤충이 발걸음에 맞춰 뛰어다녔다. 새끼 메뚜기와 방아깨비, 여치 란다. 처음엔 뭔가 했다. 발을 멈추고 쪼그려 앉아 한껏 동공을 확장해야 볼 수 있는 크기다. 1cm 크기의 메뚜기라니! 그러나 그 뛰는 거리는 예사롭지 않다. 너무 귀엽다. 내 발에 밟히지 않으려 필사의 질주를 하는 그 작은 생명체를 보며 살아간다는 게 녹록지 않음을 배운다. 내 발걸음 한 발자국이 그들에겐 생과 사일 수 있으니 말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른 아침이면 몇 마리 까치가 마당을 제집인양 활보한다. 나무와 잔디를 오가며 배를 채우는 까치! 식사인지 간식인지...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음을 알려준다. 까치가 잔디에 숨어있는 벌레와 나무에 붙어있는 벌레를 잡으며 자기네들끼리 소란스러운 대화를 한다. 궁금하다. 뭐라 하며 사냥을 하는 것인지... 그런 까치들의 대화를 들으며 내 입장에서야 평화로운 모습이지만 곤충들 입장에선 얼마나 큰 위기 일까 싶다. 내 발걸음은 예행연습일 뿐이다. 집을 지을 때부터 날아들던 까치들은 3년째 마당을 찾고 있다. 가끔 남편과 썬룸에 앉아 까치들이 곤충 사냥을 하는 모습을 보면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관객인 우리에겐 보기 좋은 모습이나 까치와 곤충의 세계는 엄청난 생존의 세계이니 말이다. 관점이 다르면, 닥치지 않으면 치열한 삶은 잘 보이지 않는다. 두세 발자국 떨어진 것만으로도 삶의 치열함은 수묵화 같다.
가끔 정원을 거닐다 죽은 메뚜기를 보면 어쩌다 죽었을까 생각이 스치다 몇 초 지나 개미에겐 며칠간 큰 잔치겠구나 싶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이면 여지없이 개미들이 수북이 작은 부스러기들로 사체를 덮어 흔적을 지우고 있다. 내 주변 가까이 이런 지우개가 있을 것이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곤충은 자연이란 도화지에서 지우개였구나! 보며 깨닫는다. 개미가 파업이라도 해야 우리가 지우개의 소중함을 알지도 모른다. 흔적을 지우는 일이 그들의 삶이다. 살아있는 생명이 죽은 생명을 지우개로 지우듯 흔적을 없애며 하루하루 나아가는 것이 바로 공존임을 개미들에게서 배웠다. 공존이 가득한 자연의 세계! 죽음을 먹고 생명이 순환하고 있다. 내 앞마당 일이다.
배를 드러내고 죽은 나비, 벌레들이 마당에 있을 때 유난을 떨며 치우지 않는다. 개미 잔칫날을 망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집안에서 벌레의 죽음을 볼 때다. 당혹스럽다. 사실 몇 해가 지났으니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됐지만 늘 가슴이 철렁한다. 가을을 지나 겨울로 가는 요즘 아침에 일어나 이층 침실에서 거실에 내려가 커피를 내리려면 부엌 한구석에 그리마가 벌러덩 죽어있다. 죽음에 당혹하기보다 벌레라는 사실에 당혹한다. 발이 몇 개인지 알 수 없는 검은 실 뭉터기 같은 그리마를 보면 시각적 당혹에 잠시 서 있게 된다.
첫해 집을 짓고 거실에서 작은 벌레들의 사체를 보면 징그러움과 놀라움에 남편을 소리쳐 불렀다. 남편은 느긋이 걸어와 휴지로 벌레들을 잡아 화장실 변기에 조용히 넣곤 물을 내렸다. 삼 년이 지나니 죽은 벌레를 보며 징그러움 보다 궁금해졌다. 왜 집에 들어왔을까? 뭐 먹을 것이 있어 여기에 있었을까? 하고 말이다. 호기심이 강한 벌레 들이었겠구나? 탐험심으로 똘똘 뭉쳐진 얘들이었겠구나! 초록의 잔디를, 싱싱한 나뭇가지를, 비를 피할 수 있는 나뭇잎을 버리고 한눈에도 자신이 드러나는 공간에 들어온 벌레들은 무엇을 상상하고 이 공간에 들어선 것일까? 탐구심이 강한 녀석들이 들어와 길을 잃고 헤매다 돌돌 뭉쳐 죽든, 굶어서 배를 보이며 뒤집어 죽든, 그들의 마지막 삶은 호기심을 장착하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선 것이겠구나 싶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생존을 위해 들어선 걸음이지만 죽음조차 새로운 생명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생이어서 안타깝다. 잔디의 영양분으로, 개미의 식량으로, 땅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마감이 아닌 변기에 버려지는 버림이어서 아쉬웠다. 허무한 탐험가의 삶이다.
늦가을이 되면 수많은 벌레들이 알을 까고 배를 드러내 죽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잔디밭에, 수풀 속에, 나뭇가지 옆에 죽음이 즐비하지만 수많은 작은 곤충들이 그들의 사체를 분해하고 잔디와 땅의 영양분으로 돌아가기에 우린 늘 같은 하루처럼 그들의 죽음을 모른 채 살고 있음을 3년째 마당을 거닐며 깨닫는다. 그 작은 생명체들이 얼마나 많은 눈치를 보며 생과 사를 오가고 탐험과 드러냄의 죽음을 하는지 말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죽음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순리에 따라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은 죽음, 평범한 생명의 순환을 하는 죽음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