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중학생 때 기억이 생생하다. 아빠는 언니, 오빠, 나에게 워크맨을 사줬다. 그런데 각각 디자인과 가격이 달랐다. 오빠의 워크맨은 유독 광이 났다. 흔하지 않은 초록색 바탕에 형이상학적 검정색 무늬가 마구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내 워크맨은 마치 옵션을 거부하는 고집있는 모델마냥 단순의 극치였다.나중에 알고 보니 오빠의 워크맨은 언니와 내 워크맨 가격을 합한 것보다 비쌌다. 나는 아빠한테 기를 쓰고 따졌지만 아빠는 그저 허허 웃기만 했다.
나는 나이가 똑같으면 세뱃돈도 똑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나를 비롯한 동갑내기 여자 사촌들한테는 세뱃돈을 삼천 원씩 줬다. 그런데 동갑내기 남자 사촌한테는 오천 원을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씩씩 거리면서 할머니의 불공정한 행위를 고발하기 위해 현장을 급습하려고 했다. 하지만 엄마가 내 옷 뒷덜미를 꽉 잡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제발 윰전히 이쓰라."
나는 이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 부모님과 대화를 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부모님은 오빠한테 친손자가 보고 싶으니 얼른 결혼을 하라고 재촉했다. 옛말에 외손자는 결국 친가 따라간다는 말이 있다면서. 나는 진짜 그런 이야기가 있는지 네이버에서 검색을 했다. 친손자는 걷게 하고 외손자는 업는 다는 속담은 있었다. 나는 딸인 내 앞에서 친손자를 운운하는 아빠한테 서운했다.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라고 핀잔을 주는 선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지만 울분을 토해낼 기회를 엿보고는 있다.
오빠는 성인이 되어서 가끔 나한테 라면을 끓여 달라고 했다. 나는 싫다고 짜증을 냈다. 그러면 엄마가 무릎을 부여잡고 일어났다. 나는 화를 내면서 라면을 끓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 명절에 엄마를 도와 식사 준비를 했다. 나는 소고기를 구워서 접시에 냈다. 오빠가 소고기를 먹으면서 질기다, 하고 투덜댔다. 나는 버럭했다.
"그럼 네가 구워 먹던가." (주는 대로 처먹어는 자체 묵음 처리)
그런데 아빠는 오히려 나를 혼냈다.
"오빠한테 말버릇하고는."
나는 남아선호사상에 따른 차별을 집안에서 톡톡히 당했다. 물론 쉰이 다 된 막내 숙모한테 아들을 낳으라는 할머니의 공격만큼 비논리와 무논리에 당한 적은 없지만.
나는 회사에 다니면서 19리터 생수통을 자주 갈았다. 아쉬운 말을 하기도 싫었고 내 힘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힘 쓰는 일은 모조리 남자인 자기한테 시킨다면서 툴툴대던 L을 보고 더욱더 최선을 다했다. 나의 근육이여, 잠에서 깨라. 나는 남자친구가 가방을 들어준다고 해도 거절했다. "됐그등." 내 짐은 내가 들어야 마음이 편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
얼마 전 출산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서러움에 젖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둘째 낳느라 엄청 고생했잖아. 출혈도 심했고. 시아버지가 셋째 낳으랜다. 아들 있어야 한다고. 그것도 애 낳은 당일에!"
친구는 단호했다.
"묶어 버리겠어!나말고 남편 것을."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차별을 당하는 마음은 더 쉽게 멍이 든다. 시간이 지나도 빠지지 않는 깊은 멍. 아빠랑 엄마의 사고방식을 바꾸기 위해 이제는 참지말고 말해야겠다. 시골 사람과 옛날 사람이라는 명분은 그럴 듯한 명분이 아니니까. 내가 왜, 내가 뭐 어때서! 아들, 아들하니까 자꾸 사고만 치지!
(잊지 못할 이름, 친구 김필자가 생각난다. 반드시 필, 아들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던. 우리는 아들에 대한 기대감을 담은 이름이 아니라 우리만의 이름을 갖고 싶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