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오늘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스물두 살 전태일 열사 52주기
노동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 자신과 가족을 위해 인간의 존엄성에 어울리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공정하며 상당한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가지며,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사회보장 방법으로써 보충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보장받기 위하여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여기에 가입할 권리가 있다.
- 세계 인권선언 제23조의 3, 4항 《전태일 평전》150쪽 발췌
《전태일 평전》을 읽고 있다.
내가 시간 날 때마다 듣는 팟캐스트(유튜브로도 청취 가능) <알릴레오 북's>에서 전태일 열사 52주기를 맞아 11월 18일 《전태일 평전》 과 이 책을 쓰신 고 조영래 변호사의 글 모음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편을 소개한다.
전태일 열사의 삶과 더불어 당시와 지금의 노동 인권에 대해 고민해보고,
조영래 변호사의 삶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지키는 인권 변호사와 법이 갖는 의미에 대해 고민해 보아요.
소년공에서 인권변호사가 된 고 조영래 변호사의 시보 출신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와 함께 합니다.
11월 18일 저녁 7시 함께 읽어요. - <알릴레오 북스> 게시글, 사람사는세상노무현재단
이 토론의 자리에 마음이나마 동참하고자 읽기 시작한 책이건만, 읽으며 참으로 마음이 아프고도 고마웠다. 이재명 자서전의 어린 시절을 읽으면서도 같은 심정이었기에 참혹하고 슬플지라도 꼭 끝까지 읽어야겠다 다짐하게 된다(절반이 남았다).
오늘은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이 결심하고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질러 노동자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가 있다고 외치며 쓰러진 지 52년이 지난날이다. 잠시 그의 삶을 유시민의 문장으로 옮긴다.
스물두 살 노동자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오후 2시,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 책자를 껴안고 휘발유를 끼얹은 몸에 불을 붙였다. 불덩이가 되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라고 외쳤던 그는 그날 밤 10시 어머니 품에서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뒀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타계할 때까지 40년 세월을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았다.
열일곱 살에 청계천 평화시장 옷 공장의 '시다(재단보조)'로 일하기 시작한 전태일은 기술을 익혀 월급이 제법 많은 재단사가 됐지만 강제노동과 다름없는 혹사를 당하면서 갖가지 병에 시들어가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방법을 찾기 위해 혼자 '근로기준법'을 공부했는데 한자 투성이 법전을 읽을 수 없어서 대학생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탄했다. '바보회'라는 노동자모임을 만들어 근로조건을 개선해보려다가 해고당하자 청계천 옷 공장 노동자들의 생활실태를 조사한 보고서를 만들어 노동청에 보냈다. 정부와 고용주들은 사회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 박해했을 뿐 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전태일은 노동청장에게 쓴 진정서에서 평화시장의 실태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평화시장 노동자는 2만여 명, 한 공장에 평균 30명이 일한다. 노동자의 90% 이상이 평균 18세의 여성이고 전체의 40%인 시다는 평균 15세인데 100원도 안 되는 일당(보리수 주: 당시 커피 한잔 50원, 평화시장 전체는 저임금을 담합 형태로 유지했다고 한다)을 받고 하루 16시간씩 일하며 쉬는 날은 한 달에 이틀뿐이다. 평균 경력이 6년이고 평균 나이가 20세인 여성 숙련공들은 햇빛이 들지 않는 좁은 공장에서 일하느라 눈병과 신경통, 위장병, 폐렴을 앓지만 건강진단은 필름도 없이 찍는 가짜 엑스레이가 고작이다. 전태일은 탄원서에 박정희 대통령을 '나라의 아버지'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원망하기 전에 아픈 곳을 알리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고 썼다. 하루 작업시간을 (당시 아침 8시에서 밤 11시까지, 평균 14시간 및 약을 먹거나 주사 맞으며 상시 철야근무) 10~12시간으로 줄이고 매주 일요일 쉬게 하며 건강진단을 제대로 하고 시다의 급여를 50% 인상하라고 청원한 그는 이것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라고 했다. 다른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기에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전태일을 분신하게 한 것은 이념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연민이었다. -《나의 한국현대사》 유시민, 돌베개 (2021) 323, 324쪽
그 후 한국사회의 대학생, 지식인들은 전태일의 죽음으로 알려진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노동운동, 노학연대, 청년 지식인들의 노동현장 투신, 노동운동의 정치적 진출, 민주노총의 탄생 등이 모두 전태일의 분신에서 비롯했다. 그와 언제나 뜻을 같이했던 동지이자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에 대해 찾아보았다. 한 대목을 여기에 옮긴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이 사건이 확대되지 않도록 서둘러 장례를 치르려고 했습니다.
노동부와 중앙정보부 등이 이소선을 회유하기 위해서 현금을 보따리에 싸서 갖고 왔습니다.
전태일의 작은 아버지는 그 돈을 받고 장례를 치르자고 했지만 이소선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보따리를 풀어서 돈뭉치를 집어 들고 공중에다 뿌려버렸습니다.
당시에는 장례 과정에서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도리어 자식을 앞세운 부모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는 관념이 지배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런 벽을 넘어버린 것입니다.
이소선은 서울대 법대 학생장으로 장례를 치르겠다고 고집했습니다.
당시 서울대에서는 전태일의 추모식이 열리고, 학생운동이 전태일의 장례에 결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요. 그렇게 되면 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은 시간문제였죠.
다급해진 정부에게 이소선은 그때만 해도 획기적인 요구안을 내놓습니다.
① 주일 휴가제(유급 휴일제) 실시
② 법으로 임금 인상(월급공)
③ 8시간 노동제(초과근로 수당제) 실시
④ 정규 임금 인상
⑤ 정기적인 건강진단 실시
⑥ 여성 생리휴가
⑦ 이중 다락방 철폐
⑧ 노조 결성 지원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져서 전태일의 장례는 서울에서 먼 험지인 모란공원에서 진행되었습니다.
- 글과 사진 출처 블로그 : 출판사 클 '"여성 노동자들을 주체로", 전태일의 어머니라는 호칭에 가려진 인권운동가 이소선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3471842&memberNo=2982420&vType=VERTICAL
위 블로그 글에는 이소선 여사의 삶이 잘 소개되어 있다. 시간이 되신다면 많은 분들이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속 여공들과 우리는 결코 다르지 않다. 전태일의 어린 시절은 가난으로 인해 서울을 돌아다니며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온갖 수모와 배고픔에 허덕이는 하루가 가득하다. 둘 다 죽을까 봐 어쩔 수 없이 어린 여동생을 거리에 버리는 하루가 있다. 그 경험들이 그저 불만과 한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연민과 큰 희생으로 이어간 전태일의 강렬한 삶에 대해, 그의 희생으로 지금 우리의 인간다운 삶이 가능했음을 최소한 오늘 하루만이라도 생각하고 느껴보면 좋겠다.
11월 18일 저녁 7시, 알릴레오 북스 방송도 많은 분들과 같이 듣고 싶다.
전태일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나아졌고 우리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노동하고 있는지, 인간답게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