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 평론가의 <인생의 역사>를 읽고
"내가 겪은 시를 엮으며"라는 '머리글'의 제목과 글이 <인생의 역사>라는 한 권의 책과 문학 자체를 말해주는 것 같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민음사, 2018)에서 평론가 신형철은 "계속 공부해야 한다. 누군가의 터널 속 어둠의 일부가 되지 않기 위해서(44쪽)"라고 말했다. 나와 동갑내기인 한 인간이 그토록 치열하게 누군가의 슬픔을 공부하고 있고 공부해야 한다고 외치는 그 책이 뭉클하고 참 좋았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2018.9.1)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28쪽)"
신간 <인생의 역사> 역시 신형철이라는 한 존재가 자신이 겪으며 읽어낸 시와 인간의 삶을 공부한 흔적이자 과정이다. 신형철은 "2016년 한 해 동안 한겨레가 넓은 지면을 내주어 '신형철의 격주시화'를 연재할 수 있었다"고 말하며 "그런 작품들로 인생을 공부해 왔으나 아직도 무지하고 미숙하여 나는 다급하다(책머리에, 8쪽)"라고 쓴다. 예전엔 저 멀고 먼 문학이란 성에 높이 서 있던 유명한 평론가 선생의 것으로 느껴졌던 문장들이, 어쩐지 오늘은 내 문우가 쓴 글처럼 가깝게 느껴져 자꾸 뜯어보게 된다. 예전엔 상투적으로 쓰인 것만 같고 술술 쉽게 흘러나온 듯 보이던 문장들을 이제는 (2016년 당시의) 저자가 겪으며, 경험하며, 아파하며, 치열하게 살아내며 썼다는 사실을 느끼며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이듦의 고마운 점이다. 읽는 일 또한 내가 경험한 만큼 이해할 수 있는 일 같다. 그렇게 몸으로 글을 쓴 사람이 새겨 읽고 깊이 이해하며 주석을 달아둔, 앞서 걷는 자의 고마운 표지이자 흔적인 것이다. 신형철을 비롯한 모든 작가들 역시 치열한 성장 과정이 있고, 그 과정은 고스란히 글이나 책으로 남아있다. 대부분은 감사하게도 그 과정을 따라 읽을 수 있고 그 글을 읽으며 우리 역시 그와 비슷한 과정을 통과하는 중이리라.
최근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님의 묘비글을 읽었다. ("옷도 세상도 건물도 자동차도 /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노동자가 만들었습니다 /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 아닙니까"로 시작되는 글이다. 출처: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3471842)
문득 내가 있는 이 방 안의 모든 물건들을 만든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온 세상의 모든 것들을 만들어 내고 이 자리까지 옮겨온 수많은 손길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자 조용하던 내 방을 가득 채우고도 넘치는 움직임과 소리와 수고와 애씀과 어떤 마음들이 느껴지고 떠올라 마음이 울렁였다. 2014년 이사한 집주인 할머니가 왜 가구 하나가 없냐, 가여워하며 문갑 하나와 키 큰 책장을 주신 적이 있다. 창고에 오래 보관되어 있던, 어린이 스티커가 다닥다닥 붙어 있던 보르네오 가구, 그 책장 귀퉁이에 어디선가 읽은 "돌 하나에도 역사가 있다"라는 짧은 문장을 붙여 뒀었다. 그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우리의 삶도 지금 쓰고 있는 시와 같다. 매일의 하루(日)가 옆으로 걸어가면서 아래로 계절(年)이 쌓여 간다.(시는 "걸어갈 행, 이어질 연. 글자들이 옆으로 걸어가면서 行 아래로 쌓여가는 聯" 그리 대단할 게 없는 일(7쪽)이라는 신형철의 문장을 흉내냄)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영향을 주고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들과 함께.
내 지난 대부분의 시간은 아픈 것, 슬픈 것을 견디지 못하고 오직 회피하는 시간이었다. 억누르고 가리느라 모든 에너지를 쓰는 상태, 안을 살피느라 눈앞을 볼 수 없는 언제나 긴급한 상태, 나를 나로 인정하지 못하는 일그러진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상태, 주지 못한 사랑이 가득 하나 도저히 사랑을 줄 수도, 말로 꺼낼 수도 없는 상태로 오래 살아왔다. 내 책장엔 <구원으로서의 글쓰기>(나탈리 골드버그, 민음사, 2016)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글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세상의 고통과 슬픔을 고개 들고 바라보게 된 것 역시 글쓰기 탓이다. 슬픔도 고통도 내 안에 있구나, 그냥 인정하면 된다는 사실을 이번에도 가장 늦게 배웠다. 덕분에 내가 만나고 읽는 많은 문장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설령 내가 조금쯤 오해하고 오독할지라도.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위 인용)"는 신형철 씨의 문장처럼 모자라도 애쓰는 사람이고 싶다. 쉽지 않겠으나 용기 있게 모든 것을 끌어안는 작가들의 태도를 배우고 싶고 닮고 싶다.
모든 책은 <인생의 역사>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 책들이야말로 삶의 다양한 고통과 상처와 슬픔을 펼쳐 보이며 누군가 그 힘겨운 시간을 겪어 왔고 지금도 통과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연대의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글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은 신형철이라는 한 인간이 살아왔고 살고 있는 <인생의 역사>와 그가 소개한 시를 읽는 시간이다. 시를 들여다보는 깊이 있는 그의 글에서 왜 우리에게 문학이 필요한지, 왜 질문해야만 하고 질문받는 일이 중요한지, 소통하고자 글을 쓰는 것이라면 왜 좋은 글을 쓰려는 노력이 필요한지를 우리는 느끼고 배운다. 그가 몸소 "겪은 시"와 책들을 새로 만나며 우리의 하루는 또 흘러갈 것이다. "인생은 불쌍한 것이지만 그래서 고귀한 것이라고 (못) 말하는 아주 작은 사람"(9쪽)이라고 소개하는 아들 '기룬'이와 신형철 씨의 아버지로서의 새로운 삶이 펼쳐질 날들을 격하게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