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아니 에르노
어렸을 때 반 아이들은 교과서의 여백 위, 같은 자리에 연필로 작은 사람의 움직임 수십 장을 그렸다. 그러고는 여럿이 모여 왼손으로 책등을 감싸고 오른손으로 그림 있는 부분을 그러쥐고 빠르게 넘겨보며 움직임과 감탄을 창조해 냈다. 아니 에르노의 《세월》을 처음부터 읽고 있는데, 작업 방식이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험의 주체인 한 사람('소녀')이 있고, 그를 둘러싼 환경과 사건과 시간들이 순간 포착한 스냅사진처럼 제시된다. 거대한 전쟁도 들은 이야기나 사소한 식탁 위의 사물들, 분위기나 ‘소녀‘나 ’우리‘의 상태도 같은 비중으로 묘사된다. 짧은 문장으로 축약된 장면들은 오직 '우리'의 기억 속의 순간만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아무것도 없는 넓은 공간의 한쪽 벽면에 신중하게 선택된 한 장의 슬라이드를 띄우듯이. 그 순간 우리에게도 그와 비슷했던 사건, 감정, 감각이나 기억, 혹은 그와 같은 시절이 저절로 떠오르게 된다. 그 시절의 프랑스와 유럽, 그때의 작은 마을과 식료품점, 식탁, 손님들, 학교, 영화, 노래와 책들이 가져온 경험과 감각을 독자들 스스로 적극적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고, 자주 책을 덮게 한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의 나열을 통해 강렬한 '세월'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나이도 없고 날짜도 없이 그러나 세월을 통과하며 성장하는, 분명한 '나'와 '우리'라는 존재를 함께 느끼게, 새롭게 경험하게 한다. 아니 에르노의 다른 작품에서와 달리 《세월》 속의 글들이 '시' 같다고 느끼게 된다.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한 편의, 또 여러 편의 시 같고, 지금 '세월'을 지나고 있는 모두를 위한 한 권의 시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기억은 성적 욕망처럼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그것은 망자와 산자를, 실존하는 존재와 상상의 존재를, 꿈과 역사를 결합한다.(12쪽)
우리의 기억은 자신의 외부에, 시간의 비바람 속에 있다.(14쪽)
ㅡ《세월》 아니 에르노, 1984BOOKS (2019)
저는 20년째 제가 쓰는 글의 주제가 무엇보다 시간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시간과 기억이요. (106쪽)
저는 말해야 할 모든 것들 앞에서 가난했어요. 글을 쓰는 순간 모든 것이 두려웠죠. 시간이 갈수록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요. 선택이 중요한 거죠. 구해야 할 것을 선택하는 것이요.(108쪽)
ㅡ《진정한 장소》 아니 에르노, 1984BOOKS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