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날들*

by Soopsum숲섬


Dankyes 단퀴에스**


오늘은 남은 날들의

첫날이다.

물론 또 다른 첫날들이

오겠지만

꼭 이런 날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dankyes', 나이지리아 방언 무그하불어로 '마침내'

ㅡ 《뼈》 이르샤 데일리워드 시집, 김선형 옮김 231.p 문학동네




2년 전, N과 심각하게 싸웠다. 처음 5일은 N이 나가 차박을 하며 지냈다. 비도 오고 날도 추워져 마음이 편치 않았기에 집으로 들어오라 한 후, 다음 5일은 내가 나가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자유로움에 신이 났었다. 집을 보러 다녔다. 몸과 영혼을 쉬게 하는 내 공간이 필요해. 지쳤어. 같이 너무 붙어 있었어.


며칠 후 여섯 평짜리 공간을 얻었다. N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했는지 1년을 떨어져 지내는데 동의했다. 버스 타고 7, 8분 거리이니 집에서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고, 큰 창으로 햇빛이 많이 들고 멀리 한 귀퉁이에 바다도 보였다. 좋아하는 것들로 천천히 방을 꾸미고 꼭 필요하고 소중한 것들만 갖다 놓았다. 마음이 충만했다.


당시 N과 살던 집 바로 앞에 있는 독채펜션에서 청소와 관리해주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10월, 11월엔 어느 때보다 예약이 꽉 차 있었다. 덕분에 N에게 자주 들려야 했다. 해야 할 일이 점점 늘어났다. 집을 세 군데나 관리해야 했다. 들러서 얼굴만 보고 와야 하는 줄 알면서도 눈에 보이는 집안일을 가만두지 못하고 다 치우고야 원룸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내 공간이 있으니까 좋아, 하염없이 바닥에 누워 햇빛을 받고 한밤중에나 새벽에도 맘껏 책 보고 글 쓰고 와인을 마시고 춤을 췄다.


원룸 가구에 달려있는 접이식 식탁을 책상으로 쓰다가, 친구가 당근에서 발견했다며 보여준 책상이 마음에 들어 당장 사러 갔다. 장식 없이 상판만 있는 책상을 친구의 마티즈로 옮겨오느라 고생을 좀 했지만, 그 책상이 들어옴으로써 내 공간은 더는 바랄 것 없이 완벽해졌다. 지인들과 통화하며 내 집에 놀러 와, 초대도 하고 새 책상 앞에 앉아 일기를 쓰며 행복해했다.

다음날 오후 5시 반, 한쪽 눈의 망막이 떨어졌다. 전혀 아프지 않았고 단지 오른쪽 눈의 윗부분 일부가 마치 카메라 렌즈 일부를 손가락으로 가린 것처럼 검게 가려져 보였다. 다음날 생각 없이 간 안과에서 "당장 수술받지 않으면 실명합니다. 지금 병원을 나가자마자 택시 타고 서울의 큰 대학병원으로 가셔서 수술받으세요, 한시도 지체하시면 안 됩니다."란 말을 들었다. 영원히 깰 수 없는 꿈인 것만 같았다.


긴급 수술을 받고 정신없던 시간이 지나자 문득 텅 비어있을 내 방 생각이 났다. 이런 거로구나, 완벽해지자마자 그곳을 떠나야 하는 수도 있구나. 어쩌면 삶 전체가 그렇게 될 수도 있겠구나. 죽기 전에 한 번도 제대로 살아본 적 없다고 후회하는 사람이 많다더니 나도 그럴 뻔했구나.


잘하지 않으면 시작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무엇이든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내보이길 두려워하던 나였다. 대충 일 하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저런 상태로 일을 할 수 있을까 이해하지 못하던 나였다. 강사로 일하며 아직 배울 것 많고 모자람 많은 내가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완벽한 순간이란 영원히 오지 않는구나, 를 그제야 생각하게 되었다. 꽉 쥐고 있던 손을 놓아야 했다. 욕심쟁이였구나 나는. 내가 나를 쉼 없이 괴롭혔기에 몸과 눈이 무척 피곤했던 거구나. 수술 후 5주 정도 밤낮으로 엎드려 있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완벽한 방을 갖는 일도, 꿈꾸던 이상적인 삶도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 나의 소원은 침대에 똑바로 누워서 하룻밤만 쉬어보는 것이었다(당시 수술 후 망막이 잘 붙어있도록 밤낮으로 뒤통수가 하늘로 향하게 엎드려 지내야 했다). 불편 없이 잘 볼 수 있고, 편안하게 누워 잘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냥 편안하게 가고 싶은 길을 가면 되는데, 바른 길, 빠른 길이 있을 거라 믿고 그걸 찾아다니느라 많은 날을 괴로워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누워있는 동안 고마운 사람들을 생각했다. 수술 직전에 내게 기도해주신 이름 모를 수녀님, 매번 꼼꼼하게 진료해주신 의사 선생님, 자잘한 일까지 챙기는 간호사 님들…… 보이지 않게 도와주시는 병원 사람들, 수술이 잘 되라고 기도해준 친구들, 행여나 잘못될까 마음 졸이셨을 부모님이 있었고, 어느 때보다 안타까워하고 기운 내라고 응원해준 N이 있었다. 세상의 기도가 내 마음속까지 와닿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기도'라는 단어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고 진심으로 배우게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다. 신을 믿지 않지만 모든 신의 존재를 믿는다. 간절한 기도의 힘을 믿는다.


이상한 일이다. 불완전하고 불확실하고 어딘가 망가진 것처럼 보이는 지금의 날들이 얼마나 완벽하다고 느껴지는지. 마음이 고요하면 내가 있는 이 자리는 언제든 나만의 방이자 성소聖所가 될 수 있었다. 두 달 동안 겨우 30일도 머물지 못했던 아쉬운 방, 지금도 창이 열려 있고 햇빛이 들고 있을 내 작은 방이 나에게 가르쳐준 비밀이다.



* 완벽한 날들 : 메리 올리버의 산문집 [마음산책] 제목을 이 글의 제목으로 옮겨와 썼습니다.